족보이야기

[스크랩] 이삭 (마1:1-6)주요내용 - 은혜 약속 구원론

은빛그레이스 2012. 2. 21. 12:36

이삭 (마1:1-6)
주요내용 - 은혜 약속 구원론

오늘은 지난 번의 아브라함에 이어 그의 아들 이삭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 말씀을 간단히 복습하면 본 족보론은 구원의 원리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진리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서는 과연 어떠한 진리를 보여 주실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은혜에 의한 약속의 구원을 보여줍니다.

그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 중 어느 것이 옳을 까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구원을 취급하는 관점만 다를 뿐이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설명하자면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은혜이고 믿음은 사람 편에서 볼 때 믿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여러 관점에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족보론입니다. 앞으로 공부하면서 알겠지만 신비할 정도로 여러 관점에서 구원을 공부하게 되고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단히 유익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삭은 넓게는 그리스도의 예표요 좁게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영에 속한 성도들의 예표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은혜의 구원이 어떻게 되는지 이삭을 통해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이삭은 출생에서부터 은혜로 되었습니다.

창21:1-2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백 세, 사라 구십 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지 수십년이 흘렀고 나이 많아 늙어서 자식을 낳을래야 낳을 수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창18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까 사라가 그 장막 뒤에서 듣고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라고 해서 여호와께서 사라가 못 믿고 웃었다고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삭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왔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들도 기적적인 탄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대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갈4:28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나려면 그리스도를 분명한 나의 구주로 믿을 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버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 출입하면서 예배하는 성도들 중에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중생하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나와의 관계성에 관심이 없이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 종교에 열심을 내듯 복을 위해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를 사랑하시고 좋으신 그런 막연한 도움의 대상으로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가운데 있다면 예수를 구주로 믿는 구원의 확신 문제부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2. 이삭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21:4에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최초의 할례자입니다. 할례란 하나님 백성이 되는 표식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공로로 자신이 신앙을 고백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인데 더 정확하게는 유아세례와 같습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보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부모의 신앙의 유산까지도 값없이 은혜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온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엄청난 유산입니다. 이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우리가 유산으로 받아 예수님처럼 내가 죽어지고 부활하며 세상을 이기고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역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삭이 할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이 위로부터 온 믿음이 임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3. 이삭은 성품에 있어서도 지극히 은혜로웠습니다.

창22:9-10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넣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태우려면 많은 양의 장작이 필요합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는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번제용 장작을 지고 가파른 산꼭데기로 올라올 정도 나이라면 최소한 약 이십 세 전후로 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나이는 백 이십 세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충분히 늙은 아버지를 뿌리치고 도망할 수 있으나 죽기까지 순종했던 것을 볼 때 참으로 아름다운 성품의 사람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그의 아름다운 성품은 창26장에 블레셋 사람들이 샘을 가지고 논쟁할 때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양보의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인지 모릅니다. 무려 네 번이나 양보하고 양보하고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거니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라고 믿고 옮겨간 이삭의 아름다운 성품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거듭난 우리의 속사람 영의 사람은 이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고 롬7:22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했습니다.
이 중생한 새 생명과 육신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인정 많고 아무리 천성이 좋아도 그 성품은 옛창조에 속한 것으로 십자가의 공로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착한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 이삭과 같이 착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는 성령의 열매가 주렁 주렁 맺히게 되기를 바랍니다.

4. 이삭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그냥 상속받았습니다.

창26:18을 보면 우물로 아버지가 팠던 것이지 스스로 파지 않았습니다. 중동에서 우물이란 보물제1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우물로 인한 아무 수고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뚜껑만 열고 퍼 마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늘의 생수인 성령을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43:19-20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의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과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사막 같은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생수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무상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이야기는 결국 다 우리에게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물 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모든 유산도 거저 받았습니다. 이삭은 한 일 없이 아버지로 인해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천국의 모든 복락을 다 유산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모든 것, 이루신 모든 것,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모든 것은 다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엡1:3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6:15에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것은 또 다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권세 내 권세요 예수님 영광 내 영광이요 예수님 승리 내 승리요 저 천국도 다 우리의 기업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 이삭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혜 한 가지로 와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것입니다.

5. 이삭은 결혼 가지고도 기도만 했을 뿐입니다.

창24:58에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했습니다.
야곱은 결혼하려고 십사년의 청춘을 지참금으로 주며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나이 사십에 결혼했는데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창24:63에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고 고작 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도 결혼을 위한 기도였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태평하고 태연한 사람이 이삭입니다. 은혜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조급함이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해도 태평합니다.

아브라함의 노종이 먼 밧단 아람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처녀를 고르는데 수고 한 번 들이지 않고 첫 번에 좋은 신부감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이 처녀가 리브가인데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아내 때문에 이삭이 자기의 생명을 잃을까 누이라고 속였겠습니까? 그런데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도 고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도 주고 인정이 많아 그 물 많이 먹는 여러 필의 낙타에게도 물을 길러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이 처녀는 신랑을 보지도 않고 신랑에 대해 묻지도 않고 그의 신부가 되겠다고 나귀를 타고 지체하지 않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오라버니 라반은 열흘을 머물게 할 작정이었지만 하루도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인하여 얼마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는지 창25:67에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은혜 속에 살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좋은 것들이 지체하지 않고 성도에게 달려 오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건강도 달려오고 물질도 달려오고 기쁨도 달려오고 하늘의 신령한 은총들도 달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의 복입니다.

6. 이삭에게는 복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임했습니다.

창26:12-13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했습니다.

얼마나 잘 되었으면 블레셋이라는 일국의 왕이 이삭을 시기했겠습니까? 농사 알곡이 수십만 가마, 소와 양이 수십 혹은 수백만 마리는 족히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노복이 심히 많았다고 했으니 아브라함의 군사만도 삼백 십팔명이었고 에서의 군대도 사백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삭의 집에 일하는 사람만도 천여명은 족히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일할 일터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교회로 치면 천 여명의 목사들이 목회하는 교회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장은 백만 성도도 더 되는 목장이 될 것입니다. 물론 대형교회만 지향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온전히 변화만 되면 주께서 귀하게 써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귀하고 크게 쓰십니다. 정말 우리가 영의 속사람으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계속 영성설교를 하고 있는데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교인들이 주먹 구구식의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확실한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로 날로 죄악으로 치닫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을 뿐 더러 이 죄악에 빠진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만 지금 우리 기독교에 새로운 무슨 역사가 없으면 큰 어려움이 닥칩니다. 이 죄악된 세상 사람들을 지도하는데 현재로서는 완전히 한계선에 도달했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기독교의 참신앙의 진수가 아니면 통하지 않을 시대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7. 이삭은 실수마저도 아버지를 본받습니다.

창26:6-7에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더라도 이만큼 철저히 닮아야 함을 교훈해줍니다. 이삭의 실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즉 죽음과 관계된 실수였습니다. 예수님의 실수 아닌 실수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죄인에게 죽음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실수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신앙과 사랑을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실수 아닌 실수를 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힐 것을 예언자들은 예언하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를 것은 로마에까지 가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도 호화로운 궁궐 다 버리고 동족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수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불임증까지도 그 부모를 꼭 닮았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결혼한지 2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25:21을 보니까 이삭이 기도 한마디 하자 하나님께서 그냥 자식을 주십니다. 그것도 쌍둥이로 주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모두 초자연적 자녀 사건의 모형입니다. 즉 은혜 받으면 전도의 열매가 잘 맺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충만해도 전도하지 않으면 이십년이 지나도 열매가 없습니다. 은혜 받고 전도하세요. 전도의 열매가 잘 맺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삭은 무덤까지도 아버지가 다 마련했다는 사실입니다.
창35:28-29에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했고 창49:31에 보면 막벨라 굴에 이삭이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막벨라굴은 창23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은을 달아 주고 산 땅입니다.

죽음 이 후까지 다 예비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적으로 성도는 육신으로는 죽으나 은혜로 예비된 나라가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미래입니다. 그러니까 앞 날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사시면서도 이삭과 같이 건강하게 장수하십시오. 이삭이 기운이 진해서 죽었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평탄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으로만 산다면 그의 앞날은 이삭의 생애와 같이 평탄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병들지 마시고 건강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공해 많은 이 시대에 맘대로 되느냐고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면 병이 와도 하나님께서 무슨 은혜를 베푸시든지 평탄하게 도와 주실 것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이삭은 은혜 구원을 보여줍니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냥 종교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기 위해 애쓰는 의지를 사용하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십시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될 때 이삭과 같이 일생 만사형통하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은총이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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