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마1:1-6)
주요내용 - 믿음 구원론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 강해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서론적인 말씀을 몇 가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족보는 이 세상 족보이지 결코 아담의 자손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1절에 “세계라” 했습니다. 세계란 세상 족보 계보라는 뜻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개역개정판에는 계대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담의 자손이라면 원죄를 타고 나셨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이 족보는 선지자의 예언 성취를 증명하여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족보는 유대인들에게는 원자탄과도 같이 강력한 증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이루어진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기록한 변칙족보이지 장자로만 연결되는 원칙족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바로 귀한 복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족보론을 강해하는 이유가 바로 이 족보에서 이런 구속사적인 귀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예수님의 족보가 천국의 구원받은 생명록의 예표라는 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 족보론을 볼 때 구원의 진리에 관한 밝은 계시를 여기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족보론의 첫시간에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족보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다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게 됨을 보여줍니다. 모두 구원받는 예수님의 생명록에 기록되려면 오늘 이 말씀을 잘 배우셔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입각하여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의인되고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성화되고 믿음으로 복받는 신앙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 믿음으로 되는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확신해야 할 점은 아브라함은 아무 공로가 없다는 점입니다.
롬4:1에 “그런 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완적인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엡2:8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니까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원리는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실로 감사하고 안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브라함 대단한 사람인줄 아는데 본래는 우리와 동일한 사람임을 알지 못하면 성경이 풀려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연구하고 보면 그 보잘 것 없음에 우리는 백 번이고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훌륭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지 아브라함의 공로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아브라함이 탐구정신이 강해서 그가 참신이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 가정의 전통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나타나 찾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행7:2-3의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신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먼저 나타났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가 또 하란에서 머뭇거릴 때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창12장 1절 이하의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복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아브라함 아무 공로 없습니다. 가나안 땅 아브라함이 공로있어 주신 것 아닙니다. 애굽왕에게서 사라를 지켜주신 것도 공로있어서 하신 것 아닙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을 구속사의 줄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지켜 준 것입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은 누구보다 좋았지 않느냐는 반문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대개 오해를 하는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아주 좋았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조차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좋았지만 처음부터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예를 몇가지 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너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본토도 못 떠나고 친척도 못 떠나고 아비도 못 떠났습니다.
그가 일차로 떠나다 머문 하란은 어떤 곳입니까? 역시 자기 나라 갈대아입니다. 단지 변방일 뿐이지 자기 나라를 떠나지 못합니다. 당시에는 치안이 없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될 시대였기에 자기 나라를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또 친척 중에 롯이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롯까지 떠나야 하는 건데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너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으니 나의 도움이 필요해’ 하면서 끝까지 데리고 옵니다. 아직 인정을 끊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 마져 모시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앞날이 크게 지연되었습니다. 그래서 데라의 이름이 ‘연기한다. 지연시킨다’ 는 뜻입니다. 이 의미를 살펴볼 때 아브라함이 아버지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고 순종이 좋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한마디로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도 못 믿어 아내를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누이라고 속이고 큰 봉변을 당할 뻔했으며,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못 믿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있으라 했으면 흉년이 와도 지켜 주신다는 뜻이로구나 이렇게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니 다시 살려 주신다는 뜻이로구나 하고 드렸던 것은 삼사십년 후의 일이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로도 없을 뿐 아니라 믿음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의 믿음이라면 우리도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말년의 믿음만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아서 그랬고 우리는 믿음이 나쁘니까 그렇지 하니까 엄두조차 나지 않아 인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덮어버리니까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환상으로 실물로 보이시고 그토록 보여주셨건만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다고 전능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아내의 여종 하갈을 첩 삼아 이스마엘을 낳아버리고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이 14년이나 중단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한 아브라함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겠습니까? 그토록 그토록 확신 주시고 확신 주셔도 믿는 것은 잠시 뿐 지속적으로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 좋은 것으로 봐주셨던 것이지 실제로는 대단히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나중에 아들을 드리기까지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만나 주시고 만나 주시고, 체험을 주시고 또 체험을 주시고, 실패를 맛보고 맛보아 가면서, 침묵을 통해 연단시켜 가면서 깨닫게 하시고 확신을 주셔서 생긴 것이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그 자체도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예수님만 믿으면 자기 공로가 없어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천국을 기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아브라함보다 우리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신구약 성경도 없었어요. 아브라함에게는 목사도 없었습니다. 또 그 시대가 오늘날과 같이 성령시대였습니까? 오늘날은 성령시대라 인간은 연약하지만 성령의 도움을 받고 삽니다. 예수는 믿는데 성경을 잘 몰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영적 단계가 올라갑니다. 어린 믿음 시대의 요긴한 도움입니다. 마치 어린이가 세상 사는 법을 몰라도 유모의 도움을 받아 장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지만 복음을 잘 모르는 경우 방황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방언기도를 충실히 하면 장님같은 나지만 성령께서 손잡아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생겨나고 평안이 오고 죄가 떠나가고 신기하게 신앙이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방언하면 뜻을 알든 모르든 사단도 물러갑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돕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시대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혹은 그가 아버지를 잘 만나 신앙의 전통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댁과 함께 살았습니까? 꼭 한 번 전쟁에서 승리하고 십일조 드리고 축복 받은 것 밖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혹은 우리처럼 주변에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이 있었습니까? 그는 홀홀 단신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백 배나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시대 시대마다 훌륭한 주의 종들의 저서를 보면 잘 알 수 있고 무엇이 불편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는 것의 전부인 즉 여호와 하나님 이름 하나 붙잡고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 간 것입니다. 계시의 점진성이라하여 그 시대에는 그 정도 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눅16장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구원 받은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나사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사로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입니다. 배운 것도 없을 것이고 그 거지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그도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나사로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이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법칙은 결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갈3:9에 “그러므로 믿음으로말미암은 자는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14절에도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고, 29절에도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에도 있습니다. 롬4:22에 “그러므로 이것을 제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진리가 이 족보론에 숨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귀한 믿음 구원의 비밀을 깨달았고 루터도 칼빈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싶으십니까? 아브라함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 아브라함처럼 승리하고 싶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과 동맹한 다섯왕들을 파하고 롯을 구해 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믿음을 구하십시오. 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렸습니다. 또 아브라함처럼 벗이라고 칭함을 받고 싶으십니까? 또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와 같은 주의 사역을 원하십니까? 역시 믿음을 구하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시고 싶습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믿는다면 이미 그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만 등제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다 등제되도록 하십시다.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지 못할 것도 없고 받지 못할 것도 없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로 없을 뿐 아니라 믿음 또한 부족합니다. 그러나 믿음마져도 더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간구하십시다. 그러면 주께서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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