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베레스 (마1:1-6)
요약
유다와 베레스의 구원사적 의미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에게서 낳은 세 아들들은 구속사의 줄기가 되지 못함은 구원은 육으로 남이 아니요 성령으로 남을 보여준다. 그 증거로 엘과 오난이라는 두 아들들은 구속사를 역행하는 방해자가 되어 저주받아 죽음에서 볼 수 있다. 다말의 잉태를 향한 열심은 인간적으로는 불륜 같지만 영적으로는 구원사를 위한 열심으로 이해되었고, 그 이름 종려나무의 뜻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처럼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베레스와 세라에서는 구원은 율법구원이 아니요 십자가의 희생적인 구원임을 보여준다.
강해
오늘은 유다와 베레스에 관하여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속사의 줄기 가운데 유다에서 베레스에 이르는 과정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유다의 자녀들이 그 구속사의 줄기를 이어 받지 못하고 유다가 자부인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베레스로 그 줄기를 이어가는 웃지 못할 반인륜적인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놀랍게도 깊은 구원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깊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1. 육의 방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창38:1-5을 보시겠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말2:11에 보면 유다는 가나안 여인인 이방신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여기 창38장을 보면 유다의 아들이 셋인데 그 이름은 엘과 오난과 셀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손을 통해서 계보를 잇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오직 물과 성령으로 나야함을 보여줍니다. 여기 유다가 거십에 있었는데 거십은 ‘거짓된’의 뜻입니다. 육의 방법으로는 아무리 해도 거짓된 것 뿐입니다.
2. 구원의 역사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창38:6-11을 보면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취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유다의 장자인 엘은 다말에게 장가를 들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엘을 죽이십니다. 그래서 당시의 풍습대로 계대혼인법에 의해 동생 오난이 형의 자손을 책임지기 위해서 형수와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오난이 형수를 통해서 아들을 낳아도 자기의 아들이 되지 못할 줄을 알고 밖에다 설정을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피임입니다. 이 일을 보신 여호와께서 그의 악함을 보시고 그도 죽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피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 본문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과 오난을 치신 것은 피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메시야의 계보가 되는 구속사의 줄기를 방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장자 엘의 죄목을 성적인 문란죄로 보고 있습니다. 즉 엘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어갈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도 이방인과의 문란한 생활만 하고 있으니 되겠습니까? 말3:15에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경건한 자손을 얻는데 힘쓰지 아니했으니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겠습니까?
애굽의 왕은 거대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라를 통해 구속사의 줄기를 잇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의 이러한 행동은 구속사를 배반한 직무유기죄입니다. 그리고 오난이 밖에다 설정한 것 역시 메시야의 계보를 잇는데 방해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인류 구속사에 저항하는 중대한 반역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주님의 구원의 사역은 어느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엘처럼 다른 일만 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사단도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본질보다 비본질을 위해 일하도록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본질을 떠나 딴 일을 하고 다니는 것 이것이 엘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엘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오난처럼 주의 사역에 방해자가 된다면 그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오난은 ‘강력한, 풍부한’의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난은 이 정력을 쓸데없이 허비했습니다. 즉 오난이란 하나님께서 힘 주시니까 이 힘으로 주의 사역을 돕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쓸데없는데 힘을 소비하고 그런데 긴장하고 그런 것을 위해 다투고 그런 것을 위해 경쟁하고 애쓰고 쓸데없는 곳에 힘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힘은 다른 곳에 소비하지 말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모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엘과 오난을 통해서 복음의 구원사역을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사역을 위한 열심을 가장 귀하게 보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창38:11-26을 더 읽겠습니다.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놀랍게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진실한 책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습니다. 창46:12에는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는 이 자식을 손자라고 해야 할지 아들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이 무슨 대단한 사건이어서 메시야의 족보에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메세야의 계통이 되었다고 영광스런 위치에 며느리의 이름까지 넣어서 기록하고 있는가? 이 말씀 역시 구속사적인 해석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여기 다말의 열심은 한마디로 하나님 보실 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메시야의 혈통을 잇고자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을 잃은 후 다말을 불길한 여자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어도 그에게 아들을 주지 아니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구책으로 다말이 택한 것이 바로 이 방법이었습니다. 더 늦으면 경수가 그치고 자녀를 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회가 지나가서는 안된다는 다급한 심정으로 취한 행동이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메시야를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할 뿐 아니라 다말처럼 기회 지나가면 안된다는 다급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지옥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여기 다말이라는 이름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말은 ‘대추야자’라는 뜻인데 대추야자는 성경에 종려나무로 나와 있으며 그 열매가 수천 수만개 열리는 풍요롭기 한이 없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대추야자나무는 풍요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다말 즉 대추야자와 같이 천천만만의 귀한 전도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라반이 이삭의 아내가 되고 구속사의 줄기를 잇게 될 누이인 리브가에게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라고 축복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만인의 믿음의 어미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줄기를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퍼져나가는 복음의 사도행전의 연속적인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말을 통하여 보여준 귀한 영적인 비밀입니다.
4. 베레스와 세라를 통하여는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창38:27-30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그래서 다말이 자식을 낳았는데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세라가 먼저 나오려다가 안되고 베레스가 먼저 나오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먼저 세라의 손이 나오니까 산파가 그 손에 형의 표시로 홍사 즉 붉은 실을 맵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고 베레스가 나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세라는 구속사의 줄기에서 제외되고 베레스가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에도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세라의 이름의 뜻은 ‘광선, 여명’으로 죄를 밝히 깨닫게 해주는 율법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요5:35에 율법의 마지막인 요한을 가리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했습니다. 또 손 역시 율법이 말하는 인간 행위의 상징입니다. 홍색은 금지 불가 혹은 십자가 구속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세라의 홍색실로 매인 손은 인간의 힘과 의, 즉 율법 즉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대신 베레스는 ‘깨뜨림, 파열’의 뜻입니다. 즉 율법으로는 되지 않기에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나타남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세라를 밀치고 베레스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깨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골2:13-15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다 깨뜨려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뿐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낱말 하나 문맥 하나까지도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베레스와 세라를 통하여 보여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결론>
오늘 배운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는 혹시라도 엘과 오난과 같이 부지중에라도 복음을 방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반대로 풍성한 종려나무 다말과 같이 전도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라와 같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며, 베레스와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이 구원받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진리를 깨닫고 모두 믿음에 거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족보인 생명록에 내 이름이 똑똑히 기록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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