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스크랩] 구속사의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 파노라마

은빛그레이스 2010. 5. 29. 03:10

                                                                        갈라디아서 파노라마

 

 


갈라디아서는 첫 부분에서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1:8,9)하는 매우 격양된 어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누가 이토록 격분하게 만들었는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2:4)들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를 통해서 복음의 씨를 뿌린 갈라디아 지방(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행13-14장)에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여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4:11)만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1:7상)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거짓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6-8)하고 격분해 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상실한 것 가운데 하나가 대적자(사탄,비진리)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적개심이 없으면 실상은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리가 당신의 닭을 물어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닭이 아니고 당신이 사랑하는 자식을 물어갔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그런 분한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여준 십자가의 도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쫒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하고 책망합니다.

그렇다면 거짖 교사들은 복음을 어떻게 변질시켰으며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이란 무엇인가?

거짓 형제들은 크게 두 가지를 들어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첫째는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며 자신들이야말로 예루살렘에서 파송 된 참 교사로 자처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에 명시된 절기들(4:10)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하고

자신의 사도권을 옹호합니다.

이점에서 유의해야할 점은 바울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헛되게 만들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도권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서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점은 말씀을 맡은 모든 설교자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설교자가 어떤 이유에서건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그가 전하는 말씀의 권위도 설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한 다음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4:11-12)하고 전도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취하고 있는 반응대로라면

저들이 예수를 부인하는 것도 아닌데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고 정죄한단 말인가?

너무나 편협한 것이 아닌가? 여길 법도 합니다

그렇치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고후5:18)하신 말씀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거기다가 무엇인가 첨부시키려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7)하는 “다른복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4)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함

형제 여러분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하고 말해주면 사람들이 환영하고 기뻐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치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 되어서

자신의 무엇인가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90%를 해주시고 자신도 10%정도는 보태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자랑거리를 갖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13절을 보면 “할레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말씀합니다

이 “자랑”이라는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는 치명적인 병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원인이

자기 중심적인 자랑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롬102-3)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지고 부서지기까지는 그는 진정 복음을 이해한 것이 못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자고(自高)하던 바울은 복음의 빛에 비췸을 받은

후로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릿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6:14)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하여 진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입니다.


이것이 어찌하여 복음의 핵심이 되는가?

이를 알려면 타락의 현장(창3장)으로 소급해 올라가야만 합니다.

인류의시조는 범죄 함으로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의와 불법이 함께 할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고후6:14)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

하나님과 단절된 인류의 절박한 숙원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그 (하나님)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구원함을 얻는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음은 자연히 풀려나가게 됩니다

한 번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런데 나는 의롭지 못하다”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과 의롭지 못한 나와의 관계는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59:2)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 앞에 두 길을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길“(3:11-12)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길이 우리들에게 의롭다 함을 줄 수가 있는가에 관건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얻어야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점을 2:16절이 명백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직 “믿음”으로 만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2:16절 한 절 속에서

“의롭다 함, 율법의 행위, 믿음”이라는 말을 각가 세 번이나 말씀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길이 율법의 행위로 가능한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한가? 를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복음 +율법+구원을 전했고  믿음+할례=구원을 주장함으로

복음을 변하려 했던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방도

이 복음 진리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방도가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3:8)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3:6)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의 조상 곧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더한 것)”(3:19)이라고 말씀합니다.

3장의 구도를 도식(圖式)으로 나타내면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함(3:8)->모세를 통하여 윱법을 주심(더한것,3:19)->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3:22)이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아브라함에게 전한)과 복음 사이에 율법이 가입되어 있는데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죄를 깨닫게 하여“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는 몽학선생”(3:24)이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여!

나는 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 상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이제도 나의 행위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적으로 의롭지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죄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탄식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복음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복음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8:1,33)하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여질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은 그냥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심”(1:4)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3:13)가능하여 졌다고 말씀합니.

즉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 남았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이 대속의 은총을 “듣고 믿기만”(3:2.5)하면 된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이 한 길만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도”외에 다른 길 다른 방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행함은 필요 없단 말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게 됩니다

여기에 “자유 자와 종”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도입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유 자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합니다

또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하십니다.


어떻게 자유하면서도 종노릇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좆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하고  “성령으로만이 가능하여진다고 말씀함으로

“믿음과 행함”의 조화와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그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된 자들만이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록된 갈라디아서가 이 시대에 어찌하여 선포되는 갈라디아서가 되어야만 하는가?

현대교회 안에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주신 복음 그리하여 값없이 거저 주시는 복음을 변케 하려는 시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누구라도 거짓의 아비에게 악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와 현대교회

그 대표적인 증상의 하나로 현대교회의 강단에서는 칭의교리에 대한 설교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변명 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드렸다 거듭났다 이제는 성장이요 성화다

이것은 복음을 일탈하여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대판 “다른 복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한번 통과하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구원 얻고

복음으로 자라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오직 복음만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칭의만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화(聖化)도 주지 못했음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강단에서 칭의교리가 사라지게 되면 성도들에게서는 기쁨도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만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2:10)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사라지게 되면 성도들은

“다른 복음”이라는 멍에 하에서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속박으로부터 성도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는 기록이 되었고

또한 선포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선포되는 현장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찬양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섬김이 있습니다.

출처 : 구속사 파노라마
글쓴이 : 바람이어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