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라마나욧 용광로처럼 역사하시는 성령

은빛그레이스 2010. 9. 11. 01:12

라마나욧 공동체(삼상19:18-24)

(들어가는 말)
요즘 고물자동차가 골칫거리입니다. 더 이상 작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골칫거리 고물이 믿어지지 않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제철소의 용광로 속을 통과하면 됩니다. 용광로 속에 코크스와 아주 높은 열량을 낼 수 있는 연료와 이 고철덩이를 함께 넣어 녹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쓰레기였고, 소용없던 물건들이 아주 새로운 모습을 가지고 우리 곁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사용했던 숟가락도 우리가 버린 고물 자전거나 운동기구, 고물자동차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물자동차나 고물 쇠덩어리만이 재활용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폐자재는 다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깨진 유리병도 제련소에 들어가 녹이면 새로운 유리가 됩니다. 구겨진 종이들도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시 훌륭한 종이로 재생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재생하는 용광로는 없을까요?

(사람을 개조하는 제련소)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무지 만나질 수 없는 간격과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도 망가지고, 인간의 지성도 망가지고, 인간의 정서도 망가지고, 인간의 사회성도 망가지고, 인간의 양심도 망가지고, 인간의 영적인 특성도 다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해야 할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은 내 목적을 위해 이용해 먹고, 사랑해야 할 자신은 학대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세계를 훼손하고 오용하는 망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망가진 사람을 재생하는 용광로만 있다면, 아마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정말 멋진 가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말 살 맛 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꾸겨진 사람은 여기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쫙 펴지고, 가치 없는 사람이 여기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슬픈 사람은 여기 한 번 통과하고 나오면 기쁨이 가득하게 되고, 외로운 사람은 여길 한번 통과하고 나오면 다시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런 용광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망가진 인간을 위하여 용광로 하나를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이 만드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전 세계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삶의 비전,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할 하나님의 용광로였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망가지고 쓰러진 이방 사람들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며, 이방인들이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복된 계획 속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야 할 용광로의 계획을 수포로 돌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또 다른 용광로를 가동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를 생각할 때, 부족한 것 투성이라고 느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용광로입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있습니까?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깨어납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이 땅에 두시고, 왜 우리를 시장에 가게 하시고, 왜 우리를 학교에 가게 하시고, 왜 우리를 직장에 보내실까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용광로 노릇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망가진 마음이 당신을 만날 때 새로워지고, 슬픈 마음이 당신을 만날 때 위로를 받으며, 힘빠진 사람들이 당신을 만남으로 새로운 인생의 용기를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상의 예 - 라마나욧 공동체)
저는 성경상에서 사람을 녹이는 특이한 용광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무엘상19장18절-24절까지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광로가 어떤 것인지,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 우리 가정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파송된 사역자로서 각자는 일터에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본문의 내용)
다윗의 인기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다윗이 물매 돌 하나로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2.80m)을 때려 눕혔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입 소문으로 퍼지자,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민족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 영웅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왕궁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어서 자기 사위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소년을 온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은 다윗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가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고, 자신의 왕위가 다윗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 염려가 사울의 마음을 흔들자 사울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힘을 다해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18장부터 19장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11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로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더 이상 왕궁에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노래하던 세상은 이제 다윗을 밀고하는 사람이 충신이 되는 분위기로 뒤집혔습니다. 다윗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피할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자로 라마에 있는 자기의 멘토, 자기의 영적 스승인 사무엘 선지자에게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다윗은 사무엘에게 사울 왕이 자기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다 이야기 합니다. 사무엘은 라마 지역 안에 나욧이라는 동네에 세운 선지학교로 다윗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을 버린 다음부터 한 일은 다음세대 사역자를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라마나욧에 선지학교를 세웠고, 그곳에서, 민족을 지켜갈 건강한 다음세대 선지자를 키움으로써 부패한 이스라엘, 부패한 민족, 부패한 신앙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같이 믿음 안에서 찬양과 기도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지냅니다. 그러는 동안 다윗은 마음속의 두려움들이 다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밀고했는지, 사울이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일급 살인청부업자를 보내고, 살인청부업자는 다윗을 죽이려 라마나욧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지자 학교에 도착했을 때, 사무엘은 선지 학생들과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 찬양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얼마나 강력했던지 이 살인 청부업자는 본연의 소임도 잊고 그 무리와 함께 휩쓸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언을 합니다. 유대인 주석가들은 그 찬양과 예언의 내용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이 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왕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한편,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사울은 화가 나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훨씬 강한 살인전문가를 선발하여 라마나욧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라마나욧에 도착하자마자 똑같이 찬양하며 예언하였습니다. 사울은 또 다시 세 번째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감정이 없는, 그러면서도 넘어질 것 같지 않는 사람을 선별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라마 나욧에 도착하자 녹아버렸습니다. 라마나욧의 그 뜨거운 찬양의 열기와 그곳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봄기운에 얼음이 녹듯 녹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사울, ‘내가 직접 가서 죽여주마’ 하면서 직접 칼을 빼어들고 라마나욧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나욧을 가기 전에 세구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라마나욧과 4.8km가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사울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다윗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라마나욧의 선지자 학교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죽이려고 눈에 불을 킨 사울 왕이 ‘라마나욧의 선지자 학교’라는 말만 들었는데도, 사울은 이미 하나님 신에 사로잡혀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우물가부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며 라마나욧으로 갔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정작 사무엘을 만났을 때, 사울은 옷을 훌러덩 벗고 누웠습니다. 그는 왕복을 벗고, 선지자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히브리 표현에 의하면 ’거기에서 찬양하는 사람과 똑같은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울의 마음속에는 다윗을 죽여야 한다는 오기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꼬이고, 뒤틀리고, 상처받고, 열등감이 충만하고, 분노가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라마나욧을 통과하면서 똑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겠다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엇이 사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마나욧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은혜, 라마나욧에 충만했던 성령의 능력, 라마나욧 공동체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사울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용광로의 구실은 성령충만한 삶이여야만) 세상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해 달라고, 재생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을 녹이는 용광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용광로는 생각만으로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에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를 사로잡지 않으시면 우리는 용광로는커녕 또 다른 고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많아진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기까지 합니다. 교회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고장 난 사회를 고치라고 세워놓은 교회가 고물 하나를 더하는 기관이 된다면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전략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구조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용광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공동체가 되려면 오직 성령충만해야만 합니다.

오직, 성령충만해야만, 성령의 다스림이 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세상에서 지치고 깨진 상한 이들을 녹여 재생산할 수 있는 용광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우리 교회 공동체는 라마나욧 공동체처럼 은혜와 강력한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바꿀 수 있는 용광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머무르고 계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옛날, 라마나욧이라고 하는 한 지역을 주장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문제는 그분이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께 우리 삶을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주장하시고 일하시도록 우리 삶을 내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용광로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이 땅에, 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또 하나의 골칫거리인 고철로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재생하는 용광로로 서 있겠습니까? 재생하십시오. 용광로로 서십시오. 이번 한 주 동안, 직장에서 풀이 죽은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분에게로 다가가십시오. 함께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면서 그 사람의 등을 두드려주십시오.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사람, 가치 없다고 느끼는 사람, 너무 많이 상처를 받고 파손이 돼서 더 이상 회복할 능력이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을 만나서 용광로처럼 여러분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그에게 나눠주십시오.
왜 직장에 보내셨을까요? 왜 그 부서에서 일하게 하셨을까요? 왜 우리 옆에 그 사람을 두셨을까요? 왜 우리 앞에 인생을 막사는 사람을 두셨을까요?


우리 때문에 달라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가슴이 라마나욧 용광로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그들을 치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온갖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 상처가 치료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살맛나지 않아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새로운 소망을 얻고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이 깨어진 사람이 이곳에 오면 가정이 회복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강력한 용광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라마나욧 공동체는 어느 누구든지 오면 변화시키는 공동체였습니다. 라마나욧 공동체는 흡인력과 강력한 변화력을 주는 성령충만한 공동체였습니다. 우리 삶이 성령님에게 지배당하는 삶, 우리 가정이 성령님이 지배하시는 가정, 우리 교회가 성령님이 지배하시는 교회가 될 때만 고철 덩어리가 용광로 속에서 새로운 가치, 새롭게 유용한 재료로 변화된 것처럼 그렇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가정, 이런 교회 공동체가 되도록 늘 기도하시여 이 땅에서 온전한 용광로로 쓰임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홍광교회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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