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왕, 우리의 왕 예수
마태복음 2:1-12
성경에 보면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태어나실 때에 아기 예수를 거부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관주인입니다.
이 사람은 아기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와 요셉을 방으로 모셔 들이지 못하고 마구간으로 내 쫓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당시의 집권자인 헤롯대왕입니다.
헤롯 대왕은 가장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적했던 사람입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왕을 찾거든 나에게 알려 나도 경배하게 하라고 했지만 이것은 사실은 거짓이었고 왕이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의 탄생소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를 찾았다거나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누가와 달리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아 헤롯 궁을 방문한 일이라든지, 왕에게 드리는 황금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은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우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 가운데 왕이 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을 왕으로 모셔 들이고 그 분의 통치를 받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마음의 천국이 이루어지고, 우리 가정이 예수님의 지배를 받으면 가정의 천국이 이루어지고,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지배를 받으면 교회의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고 너희 안에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눅17장)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 예수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그 삶은 지옥의 삶이요 혼돈과 어둠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 사사기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의 주제가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은 국가의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신정국가입니다.
그런데 그 사사 시대에 하나님이 왕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직자가 먼 지방까지 애정행각을 벌이면서 첩을 얻어 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자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고 남자들의 노리개 감이 되었습니다.
베냐민의 불량배들은 동성애를 즐겼습니다.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이 장면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받기 직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결국 사사기 기자는 그 시대가 하나님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를 마음대로 욕보이고 윤간을 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잘못을 애통해하지 않고 오히려 두둔을 하였습니다.
돈으로 신상을 만들고 개인 제사장을 고용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왕이 되고 내 마음대로 살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잘 될 것 같고 그것이 축복인 것 같은데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내 마음대로 살면 죄의 모습이 확대되고 죄의 모습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군대에서 경험했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소대장으로 근무를 했는데 하루는 야간 훈련을 하고 집결지로 모이라는 중대장의 명령을 받고 집결지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그때가 한 새벽 두 시경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제일 앞에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제가 생각한 코스를 따라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갔을까요?
이 정도면 중대장이 오라고 한 집결지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놀랍게도 처음 출발한 곳에 다시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한 시간 내내 그 지역을 뱅뱅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될 수 있는가를 절감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생각이나 내 짐작이 아니라 나침반입니다.
비행사가 악천후를 만났을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나 짐작이 아니라 계기판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 판단이 옳은 것 같은데 막상 그렇게 살아보면 절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진리로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바른 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왜 영접하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을 영접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관건이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실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을 때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헤롯은 자기 욕심이, 자기 교만이 너무 가득 찼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 찼기에 그는 아기 예수를 모셔드릴 수 없었습니다.
여관주인의 마음에는 돈에 대한 욕심이 너무 가득 차서 아기 예수를 모셔 드리지 못하고 마구간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다른 어떤 것이 그렇게 가득 찼는지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가운데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혹시 너무 세상적인 것들이 가득 차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은 아니십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산상수훈의 첫 번째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주님을 영접할 수 있고, 주님을 영접하여 그 분의 통치를 받을 때 천국을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해지고 겸손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구세주 되신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축복이요 행복이요 자유요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되는 줄 믿습니다.
먼저, 교만한 마음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비록 많이 배우고 존경받는 박사들이었지만 더 큰 하늘의 진리 앞에 겸손하였을 때 아기 예수를 찾아 예루살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예수님의 나심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마음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면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품고 가져야 할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겸손의 마음입니다.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가장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나시고 구유에 놓이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이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이 겸손의 모습을 배울 때만 우리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고 그 분의 지배를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성지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의 탄생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 교회의 출입문 높이가 120센티미터로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보통 성인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허리를 완전히 푹 숙이고 몸을 낮추면 그 교회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신 것을 기념하여 지은 교회를 그렇게 만든 것은 정말 성탄절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겸손한 구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성탄하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높은 사람은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부자들은 금고의 교만에서 나와야 하고 학자들은 지식의 교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교만을 버리고 구유에 나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땅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무관심의 마음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이냐? 는 헤롯의 질문 앞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미가서를 인용하여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 놓고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난다고 했으면 그곳에 가볼 수도 있고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음직 한데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메시야 나심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다른 나라의 종교에 매우 관대했습니다.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로마에 협조만 잘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었습니다.
지금이 편하고 좋은데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것에 너무 매여 있다든지 다른 것에 너무 골몰하여 있다고 할 때 우리도 자칫 예수님을 소홀하게 생각할 수 있고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일에 게으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혹시 다른 어떤 것에 너무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찾지 못하고 주님을 나의 왕으로 나의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복을 주고 자유를 주고 평화를 주고 구원을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돈이, 명예가, 권세가, 오락이, 친구가, 친척이, 즐거움이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런 것에서 주님께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기 위하여 먼 곳 지금의 페르샤 지방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도 천사들의 천사의 계시를 받고 베들레헴을 찾아갔을 때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찾고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가 천국을 들어갈 수 있고 천국의 기쁨가운데 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무관심의 위험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무관심을 버리고 동방박사들과 목자들과 같이 주님을 찾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 가운데 놀랍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순종의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순종이 있었고, 목자들은 주인이 맡겨준 일에 순종하는 모습을 갖고 있었기에 주님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었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와 요셉의 아름다운 순종이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지만 그러나 이 순종은 대가를 요구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도 간혹 유대와 가까운 나라들에게 명예살인이 보도되고 있는데 2천년 전에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아기예수를 출산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베들레헴에 가서 출산한 것은 (예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지만) 어쩌면 ‘다행스런 사건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행 기간도 상당히 길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이때 에스더 같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순종’의 결단이 성모 마리아의 남다른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은 순종의 대가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거절하는 대가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순종의 대가를 통해야 하고 아울러 거절의 대가를 통해야 합니다.
금년에 나는, 무엇을 순종했으며 무엇을 거절했으며 그래서 어떤 인정을 하나님께 받았습니까?
금년에 나는, 무엇을 순종하지 못했으며 무엇을 거절하지 못했습니까?
그래서 어떤 인정을 놓치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우리들의 왕으로 오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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