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의 핵심진리이며, 바울 신학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복음증거자들이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채 증거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G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시는 어느 목사님께서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정확히 깨달으신 다음에, 지금까지 이렇게 귀한 진리를 모르고 설교나 강의를 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몹시 안타까워하시더군요.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성경 말씀을 읽어도 깊은 의미를 몰랐었는데, 이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하신 모든 말씀들이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바울 신학의 초점인 십자가의 도가 모든 성도들에게 확실한 신앙고백이 되어야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의심 없이 그리고 담대하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과 함께 못박혔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6장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군데 성경 말씀에서 동일하게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 옛사람은 육적인 애정과 욕망과 죄의 본성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혈육간의 애정이나 남녀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이나 친구간의 애정, 식욕이나 수면욕, 물욕이나 성욕, 명예욕, 모든 죄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곧 ‘옛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내가’라고 한 것은 옛사람, 즉 자아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 즉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사람 자체가 못 박혔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길 때 혈기나 질투, 음욕, 교만 등이 마음속이나 행실 가운데 나타남으로써 옛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결은총을 받고 예수님의 생명이 영속에 내주한 분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만 옛사람의 죽음을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도 바울께서 증거하신 다른 말씀을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 자신의 옛사람이 죽어 없어졌다면 무엇 때문에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겠습니까?
또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로마서 6장 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은 반드시 가나안땅에 들어간 신앙을 가진 성도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서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사실만을 생각한다면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확실하게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신앙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와 같이 영적할례와 생명이 내주합일되는 체험을 하심으로써 높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신 분들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셨는데, 모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이치를 확실하게 깨닫지 않으면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은 “아직 죽은 것같지 않다.” “나는 죄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은데 언젠가는 죽겠지.” “할례산을 통과하면 죽겠지.” 등 다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라는 성경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핵심적인 진리를 체계적으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닫고 있느냐 못 깨닫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구원파의 오류
십자가의 도에 대한 진리를 많이 남용하다가 이단시되고 있는 종파가 바로 구원파입니다. 구원파에서는 십자가의 도를 확실하게 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에 따라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판단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의인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못 받은 사람인지를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체험을 했거나 귀신을 쫓아냈거나 방언이나 예언을 하고 입신 체험이나 성령의 불체험 혹은 성령충만이나 능력행함 등 여러 가지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파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확신합니까?” 혹은 “의심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면서 중생했는지 못했는지를 판단한다고 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무조건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파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진리를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직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계속 십자가의 도에 대한 증거를 듣게 하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할 때 비로소 중생했다고 인정해줍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몰라요. 그때부터 구원파의 신자로서 그 종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지요.
또한 확실하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설명을 계속적으로 들으면서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구원받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마음속에 미움이나 분노, 질투 등의 악심이 나타납니까?”라고 질문한답니다. 그 사람이 그러한 악심이 나타난다고 대답하면 그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질문한다고 합니다.
그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그거야 날마다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보혈의 은총으로 닦아내면 되지요.”라고 하거나 “매일매일 주님께 용서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면서 계속적으로 보혈의 은총으로 닦아내면 되지요.”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답변에 대하여 무조건 “당신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부활하면 의인이 되는 것인데 왜 자꾸만 회개를 합니까?”라고 하면서 무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생활을 열심히 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복음적 신앙을 모르고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파에서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관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집에서 나가다가 날씨가 추워서 가기 싫은 마음이 생겼을 때, 가기 싫은 마음을 물리치면서 억지로 가게 된다면 그러한 행위를 구원파에서는 율법적인 생활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거듭난 성도들이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가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포기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성도들이 새벽예배를 드리기 싫어하는 마음을 회개하면서 영적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잘못 깨닫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도들을 타락하고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부터 순간순간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점진적으로 성화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죄성이 굴러 떨어지는 영적할례를 받고 생명이 내주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파뿐만 아니라 왕중생파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면 영혼 속에 내주하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승리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중국의 성자 워치만 니가 성결은총을 받은 후에 증거했던 사상들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의 사상은 성장론적으로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고 그리스도의 할례와 생명의 내주경험을 한 후 정돈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성장과정을 다 통과한 후의 체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식적으로 믿기 때문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결은총과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는 경험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경험자가 증거한 지식과 믿음만으로 다된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생활하다가 큰 갈등과 실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광야연단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초보적인 성도들에게 이 진리를 적용하기 때문에 큰 모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가 풍성한 생명력으로 말미암아서 승리의 생활을 하기까지는 약 15년이라는 기간 동안을 광야연단과정에서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고 그 경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성장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워치만 니의 사상을 잘못 적용하기 때문에 큰 모순과 갈등과 실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파나 왕중생파에서는 율법적인 노력을 포기하면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분명히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파에서는 “포기하세요. 포기하세요. 당신이 자꾸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면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성도들은 그대로 실천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할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실패의 경험을 계속하게 되면 큰 고민에 빠졌다가 그 사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워치만 니와 같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고 생명이 내주하신 경험이 없기 때문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할례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진리가 선명하지 않으니까 완전하게 된 것으로 착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자연히 현실과는 큰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할례 즉 성결은총을 받지 못한 성도들이 죄성이나 정욕이 요구하는 대로 계속적으로 생활을 한다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왕중생파에 속해있던 P목사님이라는 분이 저희 집에 오셔서 제가 며칠 동안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진리를 증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정에서는 60세 되신 아버님의 생신잔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 때마다 반찬이 풍성했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은 반찬이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데도 음식 준비를 하느라고 바쁜 가족들에게 “상추쌈을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목사님의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바로 식사할 때 마음 가운데 상추쌈이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부탁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욕망을 억지로 절제하게 되면 율법적인 생활이라고 양심과 지성이 가책을 받게 되니까 먹고 싶은 생각과 욕망이 나타날 때 부탁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니까 범죄하지 않고 의롭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면서 실상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생활하는 큰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래서 왕중생파에서는 새벽예배를 드려야하는 시간인데 춥거나 귀찮거나 여러 가지 악조건이 생겨서 가기 싫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는데도 억지로 가게 된다면 율법적인 생활이므로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새벽예배를 가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지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생겨서 새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면 곧 하나님의 생명이 주장하는 것이므로 복음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P목사님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가족들은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는 P목사님을 행실이 타락한 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시던 중에 P목사님은 등과 목에 마귀가 붙어서 큰 고통을 당하시다가 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잘못 생활하신 것에 대하여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그 병도 깨끗이 고침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진리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파의 경우에도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만 하면 이미 의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성자 성녀들을 본받는 생활이나 참회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전체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에 대한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성도들이 옛 사람의 죽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여기에서 ‘마지막 아담’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러면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속죄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 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아담에 대한 진리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하여 창조론을 참조하면서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어 에덴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원래 모든 만물과 우주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결과로 에덴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심령 속에는 마귀적인 성질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마귀는 저주받은 인간의 심령과 육체를 통해 활동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하게 함으로써 지옥백성이 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크게 네 종류로 분류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해와 달과 별과 천체 모두가 있는 우주를 가리켜 말하며, 또 한 가지는 흙이나 광물, 동물, 식물 같은 것을 종합하여 말하는 만물이며, 나머지는 사람의 육체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이 모든 피조물들이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에게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부속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될 뿐만 아니라 우주와 만물 그리고 사람의 육체와 성격, 즉 모든 피조물들을 포괄적으로 담은 이름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한 개인으로만 보시지 않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대표적인 이름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담’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고 저주를 받게 되자 모든 피조물들이 동시에 비참한 운명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된 우주만물 모두가 다 무가치하고 소용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예수님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시해야 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표현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둘째 아담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첫째 아담 안에서 저주받은 모든 피조물들(과거와 현재와 미래, 우주만물이 없어질 때까지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함)을 예수님 안에 담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모든 피조물을 담으신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사시다가 그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 안에 담겨진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예비해 놓으신 엄청난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 즉 혈기를 내고 욕을 잘하고 교만하고 음란하고 거짓말하고 아집적이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뭉쳐진 자신이 모두 마지막 아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 가운데 자신의 생활을 자세히 성찰해 보면, 여전히 죄를 범하기 쉬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악심이나 악행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악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 옛사람, 즉 자기 자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마지막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억지로 믿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십자가의 도를 정확히 깨달은 다음에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알고 세례를 받는 분은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옛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제거한 사실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 생활 가운데서는 죽지 않고 여러 가지 죄가 나타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 주관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신학과 워치만 니 사상의 초점입니다.
워치만 니의 경험
워치만 니 성자의 경험을 살펴보면 이러한 원리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연단과정을 통과하게 된 워치만 니는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기면 마음과 행실로 범하는 죄 때문에 큰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죄지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혈기나 미움, 질투와 음욕이 생기는 것을 마음속에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 싸움에서 거듭거듭 실패를 하는 가운데 워치만 니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알게 된 것은 자신은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해도 죄덩어리 자체인 자신을 결코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식도 해보고, 유명한 부흥강사를 찾아가 보기도 하였으며, 영적지도자를 만나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지도자들을 만나서 상담을 할 때마다 워치만 니에게 로마서 6장 11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권면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은 것으로 여기고 노력하여도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기면 마음과 행실 가운데 죄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워치만 니는 1927년 어느 날 두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큰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예수님과 관계없이 옛사람, 즉 자기를 죽이려는 노력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말씀을 볼 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워치만 니는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에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마지막 아담 되신 그리스도 안에 담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워치만 니는 예수님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말씀을 보고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죽으려고 할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죽어지지 않고 여전히 화를 내고 질투를 하고 음욕을 느꼈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기쁨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옛사람이 예수님을 떠나서 따로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워치만 니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라는 것과 범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성질이 마지막 아담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려고 애를 쓰던 자신, 즉 죄성이 뿌리박힌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 저주받게 된 우주와 만물 그리고 우리의 육체까지도 모두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한 개인의 몸이 아닌 마지막 아담, 즉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을 짊어지신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격이나 육체, 천지, 만물,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 안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계실 때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어디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한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다고 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 어디에나 우리 모두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이 임종하실 때 계셨던 곳은 어디였습니까? 바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피조물, 즉 우주만물을 비롯하여 우리의 모든 소유들이나 현대인 혹은 옛날 사람들, 미래인들까지도 모두가 마지막 아담이셨던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육성 즉 옛사람까지도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죄성의 지배를 받아 부끄러운 마음과 행실이 나타날 때마다 탄식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옛사람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증거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아무리 의롭고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아보려고 할지라도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는 여전히 범죄할 수밖에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또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속성 즉 죄성과 정욕덩어리인 옛사람은 죽음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는데, 이러한 죽음도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 안에 확보해주신 죽음을 공급받음으로써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적타락한 옛사람의 죽음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기독교는 절망의 종교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옛 사람이 죽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의로움과 행복의 세계가 재창조되는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맛보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경험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이치에 대해서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창조
우리는 지금까지 성도들의 옛사람(롬6:6)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마지막 아담 안에서 끝났다면 성도들의 믿음은 무익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공자 혹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현들처럼 육체가 죽음으로써 끝났다면 기독교는 절망에 빠진 종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큰 복을 주셨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된 몸은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의 몸과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된 몸은 나사로의 몸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된 몸은 가로막혀 있는 벽과 잠겨있는 문이라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고, 사람들의 손으로 쉽게 붙잡을 수 없는 몸으로서 천사들과 비슷한 신령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에 걸리거나 가시에 찔릴 염려도 없고 음식을 먹고 배설물을 만들어내는 일도 없는 신령한 몸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큰 능력에 의하여 신령한 몸으로 재창조하신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이었고 하나님의 깊고 넓은 신비가 담겨진 축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인가를 알게 해주는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바를 통하여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몸과 성격 또한 천지만물 등을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와 만물과 사람들의 몸과 성격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포괄적으로 담으셨던 것들을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새로운 세계에서 생활하는데 필요로 하는 피조물들 즉 신천지와 만물, 거룩한 성품 등을 확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재창조된 모든 것들은 조금도 흠이 없는 완전한 것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실 때, 물질적인 천지만물이나 육체, 정욕 혹은 성격 등과 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써 죽으셨을 때 다른 피조물들은 모두 죽고 없어졌지만, 영혼만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죽지 않고 남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영혼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모든 것들을 확보하여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영혼들은 영생복락을 누리는데 필요한 새생명과 부활체 즉 신령한 몸과 거룩한 성품과 새하늘과 새땅과 만물을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확보하여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재창조된 신천지와 만물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새하늘과 새땅과 새로운 만물’이 그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아담 안에서 창조된 물질세계에 속한 곳이므로 재창조 전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영혼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선물이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위대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것에 대하여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원한 천국 즉 신천지에는 아름다운 산천초목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과일들이나 아름다운 생활환경, 집이나 옷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필요 없는 전쟁무기들이나 의료기구 같은 것들은 없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영혼들이 필요로 하는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로운 만물과 신령한 몸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이미 확보해 놓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도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휴거되는 성도들의 몸은 순식간에 부활체로 변화되고 무덤 속에 있던 성도들의 몸은 부활체로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성품인데 그것은 죄를 범할래야 범할 수 없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선만 행할 수 있는 이러한 성품들은 하나님의 생명 즉 예수님의 생명 안에 있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생명 안에 새로운 성품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생명으로 거듭난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http://cafe.daum.net/2007again(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성광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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