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렙산 (출3:1-12)
초점 : 연합론
요 약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불결한 신을 벗고 사명을 받았듯이 하나님께서 인격 속에 나타나실 때 성도는 거룩해지고 사명을 감당할 능력이 주어진다. 그럼 어떤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가? 하나님과의 합일은 기본적으로 예수 믿을 때 주어진다. 그러나 모세가 절망 중에 하나님을 보았듯 자기에 대한 절망을 통해 나를 부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인격에 나타나신다. 그리고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듯이 자기 영혼부터 먹이는 철저한 예배의 삶과 이웃을 위한 영적 봉사를 통하여 더욱 충만히 나타나신다.
이 시간에는 '호렙산'이라는 제목입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산입니다. 이 산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산입니다. 왜냐하면 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했고,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엘리야는 이 산에서 아람왕 하사엘과 이스라엘왕 예후를 기름 붓고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와 관계가 있는 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담고 있는 구속사적인 의미는 아주 큽니다. 칼빈은 이 여호와의 사자의 나타나심을 성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타나심 대로 장차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관계가 있고, 나아가 성령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나심을 교훈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는데 율법과 선지자의 최대의 업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토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위한 임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격에도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귀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럼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첫째는, 모세가 불결한 신을 벗듯이 주님의 거룩하심을 입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가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격에 사단이 나타나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우리의 심령과 행실은 예수로 입혀져서 깨끗해지고 맙니다.
둘째는, 모세가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듯이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
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이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14:10에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그러시면서 다음 다음 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자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즉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럼 모세는 어떻게 자기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를 만날 수 있었습니까?
1.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학자들은 모세의 미디안 광야 40년의 세월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우울했던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왕궁의 그 호화로운 생활을 청산하고 빈들판에서 목자의 생활을 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동족을 구원할 수 없는 그 사실에 크나큰 절망감을 가졌습니다. 자포자기 무능력 열등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도 40년간이었으니 40년이면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가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면 인격 자체가 황폐화 및 풍토화되는 기간입니다.
행7:22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40년을 황량한 광야의 목자로 지나고 보니 그 지성은 황폐하여 광야화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입술이 뻣뻣한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비단 그의 겸손의 말만은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80세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생명을 찾는 이세벨의 손길을 피해 큰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회개를 바랬지만 이세벨의 세력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그가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을 볼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상19:14에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강한 바람 속에서는 만나 주시지 않았고, 강한 지진 그리고 강한 불 속에서는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 고요할 때 하나님께서 세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바랑과 지진과 불은 엘리야의 특심한 마음 상태를 묘사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열심 그러나 내가 붙잡고 뛰는 열심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부담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겠다는 내가 살아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알아야 할 기본 지식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나를 내려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구한 것은 동족을 구원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주의 뜻과 아주 동일하며 당연한 것일지라도 절망을 경험했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려고 했을 때 실패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심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행합니다. 행할 수 없을 때는 그 상태를 소상히 아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 샘물이 생겨나고 하늘의 양식이 내립니다. 이것이 철저히 나에 대한 절망을 경험할 때 오는 축복입니다. 예를 들면 전에는 내가 계획하던 것도 이제는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절망이 아니라 나에 대해 절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앞세우며 그 뜻에 순복하는 삶이 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게 됩니다.
2. 양무리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1-2절에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했습니다.
호렙산 아래는 물이 많고 비옥하여 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디안 사람들은 가물 때는 아주 멀고 험한 곳이지만 찾는 장소가 호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장인의 기업에 충성한 모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양무리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양무리는 넓게는 교회의 성도들이 되겠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자기 영혼부터 먹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배생활 잘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첫단계는 예배생활을 잘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성도를 위한 영적인 봉사를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 일은 그저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에 충실한 것뿐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십보라도 그랬고 라헬도 그랬고 많은 여성들이 양을 치다가 남편을 만났습니다. 당시 양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책임과 의무는 열심히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까지도 해달라고 안일하게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중세기의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이 나의 인격과 삶에 나타날 수 있을까? 그래서 금욕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고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더 큰 단점은 이 운동이 개인주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교권의 강한 반발을 참고할 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창시자 칼빈은 이미 성도는 예수 믿을 때 그리스도와 합일된 것이며 이제는 그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제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 소요리문답에도 세례란 무엇인가에도 나타납니다. 즉 성도는 세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 때 그에게 속한 모든 공효를 누리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믿음이나 세례나 신앙에 있어서 안과 밖에라는 측면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일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됨을 믿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므로 그것이 경험으로 나타나도록 함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복음에 서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예수 믿어 이미 합일된 성도들이 그 안에서 자라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양무리를 치듯이 열심히 충성되이 예배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성화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는 자랄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양무리를 잘 치면 양은 무럭무럭자라고 새끼를 낳아 번성합니다. 이와 같이 열심히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홀로 있을 때나 예배생활을 잘하면 우리 심령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 때 이미 합일된 그 축복이 우리에게 체험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속을 멀리하고 예배생활 잘할 때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거하심이 나타나시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시떨기에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가시떨기 나무는 덩굴로 되어 있어서 약하고 가시가 많아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약해도 임하십니다. 죄인일지라도 임하십니다. 부족한 인생일지라도 임하십니다. 아무리 악하고 부족해도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며 그 임재하심을 나타내십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절망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거룩해졌습니다. 큰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 역사하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내려 놓고 세속을 멀리하고 예배생활을 잘할 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호렙산의 귀한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초점 : 연합론
요 약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불결한 신을 벗고 사명을 받았듯이 하나님께서 인격 속에 나타나실 때 성도는 거룩해지고 사명을 감당할 능력이 주어진다. 그럼 어떤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가? 하나님과의 합일은 기본적으로 예수 믿을 때 주어진다. 그러나 모세가 절망 중에 하나님을 보았듯 자기에 대한 절망을 통해 나를 부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인격에 나타나신다. 그리고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듯이 자기 영혼부터 먹이는 철저한 예배의 삶과 이웃을 위한 영적 봉사를 통하여 더욱 충만히 나타나신다.
이 시간에는 '호렙산'이라는 제목입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산입니다. 이 산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산입니다. 왜냐하면 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했고,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엘리야는 이 산에서 아람왕 하사엘과 이스라엘왕 예후를 기름 붓고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와 관계가 있는 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담고 있는 구속사적인 의미는 아주 큽니다. 칼빈은 이 여호와의 사자의 나타나심을 성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타나심 대로 장차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관계가 있고, 나아가 성령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나심을 교훈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는데 율법과 선지자의 최대의 업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토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위한 임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격에도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귀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럼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첫째는, 모세가 불결한 신을 벗듯이 주님의 거룩하심을 입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가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격에 사단이 나타나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우리의 심령과 행실은 예수로 입혀져서 깨끗해지고 맙니다.
둘째는, 모세가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듯이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
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이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14:10에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그러시면서 다음 다음 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자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즉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럼 모세는 어떻게 자기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를 만날 수 있었습니까?
1.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학자들은 모세의 미디안 광야 40년의 세월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우울했던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왕궁의 그 호화로운 생활을 청산하고 빈들판에서 목자의 생활을 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동족을 구원할 수 없는 그 사실에 크나큰 절망감을 가졌습니다. 자포자기 무능력 열등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도 40년간이었으니 40년이면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가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면 인격 자체가 황폐화 및 풍토화되는 기간입니다.
행7:22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40년을 황량한 광야의 목자로 지나고 보니 그 지성은 황폐하여 광야화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입술이 뻣뻣한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비단 그의 겸손의 말만은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80세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생명을 찾는 이세벨의 손길을 피해 큰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회개를 바랬지만 이세벨의 세력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그가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을 볼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상19:14에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강한 바람 속에서는 만나 주시지 않았고, 강한 지진 그리고 강한 불 속에서는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 고요할 때 하나님께서 세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바랑과 지진과 불은 엘리야의 특심한 마음 상태를 묘사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열심 그러나 내가 붙잡고 뛰는 열심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부담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겠다는 내가 살아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알아야 할 기본 지식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나를 내려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구한 것은 동족을 구원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주의 뜻과 아주 동일하며 당연한 것일지라도 절망을 경험했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려고 했을 때 실패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심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행합니다. 행할 수 없을 때는 그 상태를 소상히 아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 샘물이 생겨나고 하늘의 양식이 내립니다. 이것이 철저히 나에 대한 절망을 경험할 때 오는 축복입니다. 예를 들면 전에는 내가 계획하던 것도 이제는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절망이 아니라 나에 대해 절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앞세우며 그 뜻에 순복하는 삶이 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게 됩니다.
2. 양무리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1-2절에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했습니다.
호렙산 아래는 물이 많고 비옥하여 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디안 사람들은 가물 때는 아주 멀고 험한 곳이지만 찾는 장소가 호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장인의 기업에 충성한 모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양무리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양무리는 넓게는 교회의 성도들이 되겠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자기 영혼부터 먹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배생활 잘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첫단계는 예배생활을 잘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성도를 위한 영적인 봉사를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 일은 그저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에 충실한 것뿐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십보라도 그랬고 라헬도 그랬고 많은 여성들이 양을 치다가 남편을 만났습니다. 당시 양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책임과 의무는 열심히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까지도 해달라고 안일하게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중세기의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이 나의 인격과 삶에 나타날 수 있을까? 그래서 금욕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고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더 큰 단점은 이 운동이 개인주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교권의 강한 반발을 참고할 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창시자 칼빈은 이미 성도는 예수 믿을 때 그리스도와 합일된 것이며 이제는 그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제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 소요리문답에도 세례란 무엇인가에도 나타납니다. 즉 성도는 세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 때 그에게 속한 모든 공효를 누리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믿음이나 세례나 신앙에 있어서 안과 밖에라는 측면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일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됨을 믿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므로 그것이 경험으로 나타나도록 함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복음에 서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예수 믿어 이미 합일된 성도들이 그 안에서 자라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양무리를 치듯이 열심히 충성되이 예배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성화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는 자랄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양무리를 잘 치면 양은 무럭무럭자라고 새끼를 낳아 번성합니다. 이와 같이 열심히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홀로 있을 때나 예배생활을 잘하면 우리 심령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 때 이미 합일된 그 축복이 우리에게 체험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속을 멀리하고 예배생활 잘할 때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거하심이 나타나시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시떨기에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가시떨기 나무는 덩굴로 되어 있어서 약하고 가시가 많아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약해도 임하십니다. 죄인일지라도 임하십니다. 부족한 인생일지라도 임하십니다. 아무리 악하고 부족해도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며 그 임재하심을 나타내십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절망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거룩해졌습니다. 큰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 역사하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내려 놓고 세속을 멀리하고 예배생활을 잘할 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호렙산의 귀한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에 발 산 (신27:1-26) (0) | 2010.07.18 |
---|---|
[스크랩] 세일산 (신2:1-9) (0) | 2010.07.18 |
[스크랩] 길르앗산 (창31:17-29) (0) | 2010.07.18 |
[스크랩] 모리아산 (창22:1-19) (0) | 2010.07.18 |
[스크랩] 아라랏산 (창8:1-12) (0) | 2010.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