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야곱과 유다(마1:1-6)
야곱과 유다(마1:1-6)
주요내용 - 연단구원
요약
야곱과 유다의 구원사적 의미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야곱은 선택구원의 예표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선택하심은 인간의 행위대로 선택하지 않으심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야곱에게 그러하신 것처럼 선택된 사람은 악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고 온전케 하시고 주시고자 하시는 약속을 다 누리게 하신다. 유다는 두 형들의 실수로 넘어온 구원이다. 유대인들의 타락이 이방인의 구원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더욱 예수 구원과 은혜 구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강해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 중에서 야곱과 유다를 할 차례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믿음구원을, 이삭은 은혜구원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럼 오늘 말씀하고자 하는 야곱과 유다는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먼저. 야곱은 선택구원을 보여줍니다.
창25:23을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민족이 저 민족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선지자는 말1:2-3에서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바울은 롬9장에서 선택구원의 교리의 근거를 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엡1:4-5에도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택구원이란 신학적으로는 칼빈의 예정론입니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개인의 궁극적인 운명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예정론은 역사 속에서 많은 논쟁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정론은 구약에서도 그 뿌리가 발견되고 신약에서는 바울로부터 시작되어 중세기 대신학자 어거스틴을 거쳐 죤․칼빈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오늘날 장로교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에 많은 반대 이론이 있었고 현재도 많은 교회들이 이 이론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이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전도의 약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예정은 좋든 싫든 성경에 기록된 사실이란 점입니다. 바울은 롬9:10-26에서 긴 내용으로 이 진리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과 에서를 비유로, 바로왕과 모세를 비유로,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그리고 호세아의 예언을 언급하면서 이 선택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야곱을 통해 보여주는 선택의 진리란 무엇일까요?
1. 구원은 인간의 의로 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방금 롬9:11-13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장 악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야곱을 사용하십니다. 알다싶이 야곱은 얼마나 악한 사람입니까? 투쟁심도 강하고 사기성도 많아서 형의 약점을 노려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축복까지 다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영적 족장이 된 것은 선택은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을 보고 택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원하신 사랑으로 선택하셨다는 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와 공로를 보시고 택하셨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차례도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어서 구원입니까?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믿음도 결코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주셔서 믿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구원이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 택한 자녀는 결코 버리시지 않고 보호하시고 연단시켜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야곱이지만 그를 버리지 않으사 외갓집으로 피해 가는 도중에도 벧엘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어느 곳에 있든지 보호해 주시고, 반드시 가나안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라반의 온갖 꾀임에서도 부자가 되게 하시고, 돌아오는 길에도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얍복강가에서 또 다시 축복하시고, 에서의 군대에서도 야곱을 도와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얄밉기까지 한 이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복을 주시는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한 욥7:17-18과 같이 하나님께서 죄인이지만 우리들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훈련시켜 참믿음을 갖게 하사 이스라엘의 영적 족장으로 세우시고 가나안의 막벨라굴에 묻히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연단하셔서 거룩한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선택의 진리입니다.
장로교 신도게요 10장 3항을 보면 유아나 복음전도가 없던 시대의 사람들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유아 시에 죽는 택함 받는 유아들은 그 기뻐하시는 때와 곳과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되고 구원을 얻는다. 또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 받을 수 없었던 다른 모든 택함 받은 사람들도 유아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선택된 자라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수를 알게 하셔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영혼들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여부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결국은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에, 메시야의 계보가 유다에게로 넘어왔는데 유다를 통한 구속사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실패가 가져다 주는 구원입니다. 실패가 가져다 준 구원 생소한 말씀같지요?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서열로는 루우벤이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루우벤은 계모를 범하는 죄를 지어 이 축복에서 탈락되고 맙니다. 또 둘째인 시므온은 할례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세겜 사람들을 쳐 죽인 죄로 역시 이 축복을 잇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영적 장자는 유다에게로 넘어옵니다. 이것이 타인의 실수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구원의 원리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의문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는 야곱같은 죄인도 택하신다더니 이제는 그런 것 따지느냐 하나님의 잣대가 왜 그러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배경이란 그 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이기에 합리적일 수도 비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이 그것을 통해 지금 무엇을 말씀하려고 그런지 가장 근본적인 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루우벤과 시므온의 실패가 유다에게 장자권을 주었던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롬11:12에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정말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한 구원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롬11:12에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비슷한 비유를 눅14장에서 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했는데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주인이 노하여 그들을 버리고 거리나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있자 아무든지 빈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이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똑똑하면 못받아요. 똑똑하면 사역을 위해 사용하시지도 못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니까 하나님이 쓰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똑똑하면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연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다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저는 몰라요 가르쳐 주세요. 저는 능력도 없어요 능력 주세요. 저는 부족해요 하시라는 대로 하겠어요’ 이렇게 부족을 시인해야 하나님께서 쓰시지 그렇지 않으면 쓰시지 못합니다.
행13:46에도 유대인들이 배척하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러면서 48절에 이방인 중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를 통해 보여주는 진리를 통해 천하고 버림받을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인의 실패가 가져다 준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이것도 은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무 권리도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교만하지 말고 오직 은혜 오직 사랑으로 받을 자격이 도무지 없는 자가 받았다고 생각하고 감사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설명하면서 그러나 한 가지의 경고를 합니다. 아무리 우리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감람나무도 버리셨는데 돌감람나무인 너희겠느냐(롬11:22)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 만은 결코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권리로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라고만 대답할 뿐입니다. 마치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이 예루살렘에 구경 나왔다가 로마 군병에게 붙잡혀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져서 큰 복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정말 뜻밖의 구원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처럼 정말 우리가 예수 믿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 감격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를 통해서 보여주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야곱과 유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야곱을 통해서는 선택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유다를 통해서는 타인의 실패로 말미암는 구원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변함없는 예수구원이요 은혜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든지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와 전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