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탕자의 비유(달려가는 아버지)
탕자의 비유 바로보기 달리는 父 / 누가복음 15:20-21
오늘은 '달리는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두 아들의 유명한 비유이야기를 성경을 중심으로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기때문에 믿지않는 세계에서까지 인용하고 회자되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인즉은 간단합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둘째가 어느날 아버지 앞에 나와서 "나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좀 주시오" 하고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한 끝에 웬까닭인지 아버지가 그 유산을 내주고 아들은 집을 떠나서 나라를 옮겨 이방 땅으로 가게 되지요. 그리고 다 거덜을 내고 거지 몰골이 되어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안아주시고 용서해 주셨다라는 짤막한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이 스토리속에는 우리가 그냥 스케치하듯이 대강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이 누가복음 15장은 학자들 세계속에서는 얼마나 중요했든지 '예레미야스' 같은 비유학자는 심지어 누가복음을 "누가복음의 심장부분이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15장을 이해하지 않고는 누가복음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의 모든 스토리가 사실은 15장에 결론 되어졌다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이 두아들의 이야기에서 그 당시에 문화 전통으로 돌아가서 깊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데 도대체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도대체 뭐며, 유산 문제가 어떻게 분배가 되어졌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의 아버지는 집안에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위치는 절대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엄격한 룰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기 위해서는 원칙적인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유산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둘째 아들은 천인공로 할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버지 빨리 죽으시죠." 그런 의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에게는 아버지는 필요없고 아버지의 가지고 있는 능력과 기능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웬 까닭인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할 수 없이 들어줍니다. 물론 아버지는 요구를 안 들어줄 수도 있고 집을 못떠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이상하게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집을 떠나는 것을 두고 봅니다. 자! 그래서 이 둘째는 먼 나라로 가서 어떻게 파멸을 맞게 되는가를 자세히 성경을 통해 목격하도록 하겠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그후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더니
유대땅 어느 곳에 흘러가서 산것도 아니고 나라를 옮겼어요. 그 당시 이방은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개념입니까? 사람취급을 안하는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쩌자고 나라를 옮겨버려요. 둘째는 돌아올 의지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하고는 다시는 안볼것처럼 결별을 하고 사실상 떠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무서운 자식입니다. 이런 자식 하나 낳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어머니들이 하도 속을 끓이고 애를 먹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너같은 자식을 낳아라" 라고 말하는데 제일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것을 탕진하고 낭비하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15절에 그 나라 백성중에 한 사람에게 붙여사니.. ...라는 뜻은 이방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기 민족이 개,돼지 취급하던 그 이방 사람에게 빌어 먹고 살아요. 종이 되어 살아요. 그런데 더 가관인것은 그 이방 사람이 그에게 들로 나가서 돼지를 치게 합니다. 돼지는 그 당시 유대 문화속에 돼지는 가장 협오스런 동물이었고, 가장 경멸시 여겨지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가 할수없으니까 돼지 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또 보세요. 16절에 보면 돼지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자가 없는지라 정확이 이야기 하면 너무 배가 고프니까 돼지 먹이를 먹고자 하는데도 주는자가 없었다고 소개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 이상의 피멸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 때에는 이미 유대인들이 여기저기 '디아스포라'가 되어서 이방 땅에 많이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어느나라에 가서 살던지 사도행전에 보면 회당이 많이 나오는데 회당을 중심으로 그들은 공동체의 문화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하나 낯선 유대인이 흘러 들어와도 반드시 자기 민족을 한데 버려두지 않고 거두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움까지도 받지 못받고 있었습니다. 민족에게도 버림받고, 돼지에게도 버림받는 이방인의 종이 되어있는 파멸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욥기서에 보면 욥이 모든것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친구와 아내까지도 조롱하는 고립 무언에 처지에 던져지자 모든 도움과 곁에 있는 분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앞에서도 면박을 당했습니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궁창을 지을때 너는 무엇을 했지? " 근본적인 질문앞에 말문이 막히는 영혼의 적막함을 경험합니다.
그때 비로서 이런 고백이 터져나옵니다. "전에는 내가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이런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자기는 전에 보고 다 알고 살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떠나가 버렸을 때 자기가 눈먼자였고, 듣지 못하였던 자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보게 됩니다.
둘째가 어느 자리에서 결국은 어느 곳에서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를 기억해 냅니까? 돼지우리 자리에서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이해하면 안됩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결국 돼지우리에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 삶 자체가 돼지우리의 삶이다'라는 그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 집을 떠난 그 삶 자체가 아무리 영화를 누리고 잘 사는것 같이 겉은 보여질찌라도 그것이 돼지 우리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순간부터 이미 이 사람은 돼지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동의를 하던 안하던 우리가 별일 없이 잘 사는것 같아보이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품을 떠난 순간 그 인생 자체가 돼지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서 이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이말을 찾아보니까 '엘스 헤아돈 데 엘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헬라말의 어의를 들여다 보면 '그가 드디어 회개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의를 다시 풀어 해석하자면 '비로서 자기 몰골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라는 말이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구원론이라는것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회개에 관한 부분입니다. 회개는 오늘 '스스로 돌이켜' 이 표현으로 봐서 인간의 의지에 주도권이 있는 것처럼 씌여졌습니다. 그런데 회개란 정말 그럴까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성경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실 누가복음 15장 전체를 봐야 합니다. 누가 복음 전체에는 세가지 비유가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비유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계속 연달아 말씀되어진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비유는 하나만 들여다 봐서는 구조 자체를 알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앞에 잃은양의 비유, 앞에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풀어야 탕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15장 1절>로 돌아가서 보십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들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죄인들과 세리들이 정통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너무 싫어하는 대상들이 예수님에게로 말씀을 들으러 나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마땅치 않았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동이 너무 너무 싫고 마땅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정통 유대인이면 유대인답게 품격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꼭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죄인, 세리 , 창기 거기에서 머무는게 아니고 그들과 늘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하고, 매일 병든자들 찾아다녀서 고치고 그런단 말입니다. 이것이 늘 마땅치 않아서 2절에 보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근거려'..이렇게 말씀했는데 여기에서 '수근거렸다'는 이말은 '수근수근했다'는 말이 아니고 '투덜 거리고 불평 불만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꺼낸 이야기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첫번째는 잃은 양의 비유, 두번째는 드라크마의 비유, 세번째는 두 아들의 비유였습니다. 이 비유의 구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유는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정점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 입니다. 내용은 두 아들 이야기인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듣는자(聽者)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비유를 들을 때 서리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풀어갈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그 상식적인 심경의 변화와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청자의 입장에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삼각구도를 가지고 이 본문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투덜거림 때문에 이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비유가 연달아 등장을 합니다. 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여기서 ('비유'.... 파라볼레) - 세가지 '비유'를 이야기 하시려면 복수로 써야합니까? 아니면 단수로 써야 합니까? 복수로 써야되지요? 그런데 유독 여기서 표현한 '비유'라는 단어만은 단수를 썼습니다. 세가지 이야기를 하려는데 복수를 쓰지않고 단수를 썼습니다. "내가 앞으로 당신들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할텐데 사실은 그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두 탕자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잃은양 ,드라크마의 이야기를 놓치고 지나가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어 하나의 주제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그런 차원에서 우선 잃은 양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백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몇 마리를 잃어버렸습니까?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두번째 비유로는, 열드라크마가 있었는데 몇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나요?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드라크마는 당시의 화폐 가치로 볼 때 큰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열개나 있으면서 한개를 그렇게 찾았지요? 백마리나 있었으면서 왜 한마리를 그렇게 찾았지요? 여기에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백마리가 있어야 완성입니다. 그리고 열 드라크마는 꿰어서 여인들이 혼수용품으로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한 드라크마가 빠지면 혼수 자체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가 마저 채워져서 열개가 이어지고 꿰어져야 혼수로써 가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드라크마를 그렇게 찾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세 비유를 숫자로 계산해 봅시다. 100:1 이것은 동물이예요. 10:1 이건 재물이예요. 오늘의 비유는 2:1입니다 두 아들 중에 하나는 떠나게 되지요. 이것을 히브리사람들이 문학 표현속에 점층적 기법이라고 하는데 100:1은 동물이었어요. 10:1은 재물, 돈이었습니다. 2:1은 사람이었어요. 100중에 하나를 잃어버려도 동물인데 찾았어요? 안찾았어요? 10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사물에 불과한데도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사람을 잃어버렸는데 당연히 찾겠어요? 안 찾겠어요? "하물며 잃어버린 아들을 찾지 않겠느냐? 백중에 하나를 찾을찐대, 열중에 하나를 찾을찐대 내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겠느냐?" 그 말을 강화 시키면서 이야기를 하신것입니다. 양을 잃어버렸을때 양을 찾기는 누가 찾았을까요? 양이 스스로 집을 찾아왔나요? 진도개나. 풍산개가 찾아왔을까요? 양은 지독한 근시이기 때문에 절대 자력으로는 길을 못 찾습니다. 길에 빠지기나 하지 절대 못 찾습니다. 그러면 양을 누가 찾았나요? 주인이 찾아서 어깨에 매고 와요. 생명이 없는 사물에 불과한 돈, 드라크마도 누가 찾았나요? 스스로 데구르르 하고 굴러 왔나요? 아닙니다. 드라크마도 여인이 불을 켜고, 비를 들고 온 집안을 구석구석 쓸며 돈을 찾아내요.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7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여러분! 재미있는 것은 찾기는 주인이 찾아놓고 "양이 회개했다"고 해요. 원래 수사적으로 말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회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요? '메타노이아' 이 회개란 말은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게 아니예요. 우리는 영으로 죽었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기때문에 우리가 깨달아서 ,연구를 해서 하나님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이 있는 사람이 안되는 사람이예요.
양이 주인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주도권이 양에게 있었나요? 아니면 주인에게 있었나요? 주인에게 있었어요. 드라크마도 제 발로 들어온것이 아니라 주인이 찾았어요. 그런데 10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회개를 '드라크마가 회개했다'는 의인화 표현이예요. 회개의 주도권도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주도권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그가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님이 지혜를 열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둘째가 파멸의 현장에 나락까지 떨어져서 결국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누가 하신 작용이었습니까? '스스로 돌이켜서 자기 몰골을 보게 되었다'라고 했는데 궁극적인 회개의 주도권은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오늘 제목은 '돌아온 탕자'도 아니고, '달리는 아버지' 입니다. 이 본문을 읽다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아셔야 할것은 무엇이냐하면 유대 사회는 한국 사람의 옛날 양반 정서와 너무 너무 유사점이 많아서 그 당시 문화권속으로 들어가 기록된 책들을 읽어보면 부자지간이라도 절대 아랫 사람앞에서 윗사람이 뛰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양반들 뛰는 법이 없었던것과 같은 문화적 컨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급하고 더한 일일찌라도 아랫사람 앞에서 윗사람이 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미루어 짐작하건데 매일 문밖에 나가서 서성였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 거지 몰골이 되어 변한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돌아오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아버지가 달려나갑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문화의 개념을 깨고 왜 아버지가 아들을 향하여 달려나갔을까요? 달리는데는 조금더 성경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8절)을 보겠습니다.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로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이 율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21절 그 성읍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여러분! 이스라엘 마을은 항상 공동체성을 강조했던 관습이 있습니다. 이 집안에 일어났던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온 동네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식은 율법대로라면 돌에 맞아서 죽여도 아무 소리도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떠난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정한 바입니다. 돌에 맞아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떤 예상된 상상을 하고 있었을까요? '동네 사람들이 이도 저도 뛰어나와서 돌을 하나씩 집어 들고 나왔을것이다.' 일것입니다. 사실 율법대로라면 죽여도 아무소리 할 수 없는 패역한 아들입니다. 그 때 아버지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달려 나가서 아들을 덮어버립니다. "안돼" 하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얼싸 안아 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율법을 깹니다. 아버지는 그 율법을 깨면서 "내가 돌을 맞을 꺼야" 그래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32절에 보시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거기 표현중에 형이 동생에게 불만을 터뜨리니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그 아들은 죽은거예요. 그런데 누가 대신 죽었어요? 아버지가 그 아들을 끌어안고 돌맞아서 죽을 심정으로 그 아들을 덮어 버렸어요.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이예요. 결국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 둘째 아들이 회개하는 것을 강조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도 아니요, 여기에서 가장 높이고자 했던 촛점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 돌에 맞아 죽을 아들을 끌어안고 덮어버린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지휘로써 이정도의 부유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둘째 아들이 재산을 요구했을 때는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지은거예요. 그런데 왠 까닭에 그 재산을 떼어 줍니다. 이 때 아버지는 이미 죽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의지가 있고, 마음만 먹었다면 아들 재산 안주죠. 못 떠나게 하지요. 안주면 무얼 가지고 떠나가겠어요? 못떠나지요. 그런데 아들의 그 요구에 아버지는 그냥 허락을 해요. 아버지의 허락없이 그 가출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허락한 이유가 왜 일까요?
그래야 이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집을 집으로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냥 가슴아픈 떠나 보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그 과정을 통해서 참된 아들로 살아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아담 안에서 범죄한 우리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가끔가다가 이런 물음을 접하게 됩니다. " 예수 믿는데 왜 이런 불행을 겪을 수 있나요?" " 왜 이런 일을 시련을 만나야 하나요?" 하는 문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당하고,, 자식들은 병들어서 고통당하고 있어서 매일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이라는 메일입니다. 자기는 이러한 손길에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너무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에 것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십니다. 이 아들이 오죽했으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다 했을까요? 자기가 어떻게 떠난 놈인데...
그 이방 땅에서 이방인의 종이 되어 돼지치기를 하면서 돼지 쥐엄열매도 주지 않는 박대를 겪으면서 인생을 겪으면서 거기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정나미가 떨어져야 아버지께로 눈을 돌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고 우리들을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귀로의 시간을 매일 매일 인생속에 회복해야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속에 항상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스토리 속에 둘째 아들이 돌맞아 죽게 될것을 상상했지만 그 때 위대한 사랑의 반전이 그 스토리속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아버지가 어쩌면 가장 가슴 아프셨을 그 아버지가 돌팔매속에서 그 아들을 덮어버리십니다. "안돼! 내가 용서해, 내가 대신 죽을께"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둘째 아들이 있고, 우리 속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매일 어지럽고 혼란스럽던 인생의 걸음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 우리는 그 머물렀던 자리에서 진저리를 치고 매일 아버지의 집으로 향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좌절하고 자기 자신의 몰골을 들여다보고 "여기가 내가 앉아있을 자리가 아닌데" 하고 일어나서 귀로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 싸움은 인생 끝나는 날까지 매일 하나님앞에서 이어져야 할 싸움입니다.ⓗ 글/扈一麥
다음은 큰 아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영상에서 녹취하였고 예수가좋다오/ 운영자이신 별이야 님이 타이프를 쳐서 올려드린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