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십자가의 능력?] / 사람이란 무엇인가?

은빛그레이스 2010. 1. 3. 16:18

 

 

[십자가의 능력➀]

/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천 산성교회-목양신앙훈련원 : 이천수 목사의 신학)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에 대에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도 있지만 ’생각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생각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는가? 역시 대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사고와 감각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사고란 있을 수 없다. 밝은 것은 어두운 것을 전제로 배고픈 것은 배부른 것을 전제로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상대나 전제조건 없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것이다. 이제 우주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사람의 문제를 풀어보자

 

어떤 사람이 혼자서 무인도에 상륙했다고 하지. 그리고 그곳에는 먹을 것과 쓸 것이 얼마든지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에는 먹고 놀고 혼자서 잘 살 것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자기와 함께 그 풍성한 것을 나누면 즐거워 할 수 있는 어떤 상대 즉 가족이나 이웃을 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궁핍한 가운데서는 이웃과 싸우지만 넘치고 남으면 그것을 같이 나누고 기뻐할 이웃을 찾게 되는 것이 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면 영원한 충만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신은 전혀 부족함이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빈 것)도 없으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자신의 충만함을 상대에게 줌으로써 더욱 기쁨을 넘치게 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영광(충만)을 아들에게 주시고 또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9)

 

하늘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충만하신 분이요, 하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다. 그 분에게 영원히 받음으로서 영원한 기쁨을 돌려드릴 상대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정반대의 상대로서 사람을 성경은 ‘육’이라고 말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이시지만, 사람은 ‘육’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된 존재로서 ‘운동’이라는 형식을 통해 부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한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충만하여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임재하시지만 , 사람은 자기 몸이 움직여서 체험된 시간과 공간만을 자기의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이 움직여도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채울 수는 없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성이요 사람의 부분성(그림자)l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그림자, 사진)일 뿐인 것이다

 

사람 외에 땅의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과 공간 안엣거 움직이기는 하지만 영으로 임재 하는 것이 아니요 단지 형체만 입게 된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쥐를 먹이면 죄의 형체는 고양이에게 이전되지만 고양이의 분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먹거나 행동했을 때‘자신’이 그것을 했다고 느낀다. 운동을 통해 형체의 변화와 함께 의식의 변화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을까?

 

사랑이란 의식적인 상대에게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충만을 주시 위해서 의식적인 상대가 필요하셨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므로 하나님과 대조되는 독립적인 의식의 상대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영인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을 미혹케 허락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대치되는 의식의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마귀로 하여금 사람에게 접근하여 선악을 구별하는 지혜를 갖도록 유혹하게 하신 것은 자신이 선악을 구별함으로써 의식의 주체 즉, 선택의 주체가 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이 혼자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하시고 돕는 배필을 지어 주셔서 아담이 자기 안에서 하와를 의식함으로써 자기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랑의 통로’도 동시에 주셨다. 이러한 생명 즉, 사랑의 능력을 주신 것이 생명과였다.

 

물론 아담은 하와를 통하여 유혹을 받았으나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영접함으로써 ‘나’ 즉, 사탄과 육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리고는 여자의 후손 즉, 아담을 돕는 배필의 사명을 갖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마귀처럼 될 수 없으며 반드시 이웃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영어로 conscieceㅇ니데 이것은 con(함께)과 svience(안다)의 결합어로 ‘함께 안다’ ;동감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양심(사랑의 통로)은 나와 이웃가의 관계를 가늠하는 의식작용이 된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에 간 부자는 전적으로 자기만 의식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도 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땅에 살고 있는 자기의 형제들도 의식하고 있었다. 나라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으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식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부자는 비록 세상에서 자기중심으로 살았지만 결국 자기의식으로는 자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람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

 

사랑은 주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님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셨다. 그 상대가 바로 그의 아들이었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ㅏ여 자신을 비우셨다(요 3:35; 빌 2:6)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만제 전에 택하셔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받도록 예정하셨다(요1:16).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받을 수 있는 상대로서 선택되고 예정되고 구속된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충만하신 분이시다. 과거에 충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예정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하늘의 모든 복을 받도록 하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한 미래를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이 끝없이 우리에게 입혀지는 역사가 새 하늘과 새땅 즉,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나타날 충만한 은혜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2:5-7)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입혀진 은혜는 ‘시간 전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사건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일어난 사건 속에 얽매여서 근심ㄹ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써 다 해결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담대할 수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3)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은혜는 ‘공간적인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으로 다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땅을 공허하게 만드시고 땅의 모든 것이 결국 공허로 돌아가 수밖에 없도록 하신 이유는 하늘의 모든 것으로 채우기 위함인 것이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5-27)

 

생태계에서 땅의 것을 식물이 흡수하고 식물은 동물이 먹으며, 동물은 사람이 잡아먹는 이치는 공간적으로 나타난 대속의 형체화이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들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세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도록 하는 방법도 ‘공간적인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은혜는 ‘운동적인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여여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없으므로 운동이 있을 수 없지만 우리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운동의 형식으로 은혜를 받게 된다.

 

사람은 땅에서 사는 동안 몸의 운동으로 형체를 입고 그 형체를 감으로 느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감각(5감), 자의 식(6감), 임재감(7감)을 느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운동의 형식으로) 형체의 변화와 감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더 자유로운 움직임이 잇게 된다. 날아가던가, 장소를 이동한다던가, 누구를 만아는 것이 이 세상보다 더 다양해 질 것이고 각각에 해당하는 다양한 형체(환경모양)의 변화를 체험할 것이며 동사에 그 만족감은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계 21:24-26)

 

사실 하늘나라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와 같은 운동이 있을 수 없겠지만, 영원히 충만하신 하나님이 끝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입혀주시는 방법이 이런 방법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가있을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놀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2. 시간 전의 은혜

 

사람은 시간 안에서 살고 있다. 시간 안에서 인과관계를 따라서 giod동하고 체험하고 생각한다. 자기 몸이 움직이는 것만큼 자기 것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내 재산’ ‘내 집’ ‘내 교회’라고 말한다. 그런 것들은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나’라고 말할 때는 자기 몸(형체)이나 자기가 행동하 것(생기)이나 자기가 느낀 것(5감)이나 자기가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의식, 영, 6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나’가 아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어 주신 것이요, 내가 움직이는 운동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기요, 또한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은 몸이 주위의 상황을 자각하는 작용(생령)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다고 하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오는 그림자이다. 하나님은 본래 땅을 공허하게 하시고 땅의 모든 운동과 형체는 전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나타나 보이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시간 전에 즉,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 미리 보시고 기뻐하시고 선택하시고 상대하신 ‘나;’란 분명히 이 세상에서 사는 흙으로 된 몸을 가진 ‘나’도 아니요, 오감으로 환경을 느끼는 ‘나’도 아니요, 육감을 따라 생각하고 느끼는 ‘나’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나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나’인 것이다. 시간 전의 나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만 확인되는 나이다. 이러한 난 그리스도로 사는 나이며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움직이는 나인 것이다. 이러한 나가 참된 예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인 나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를 믿고 예수로 사는 원천적인 근원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신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과 예정하신 사랑의 역사가 형체로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창세전에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미래와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그림자(허상, 우상)세상에서 사는 동안 거짓 나(육, 겉 사람)을 벗어버리고 참 나(새사람) 즉 ‘예수로 사는 나“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5-10)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노력은 전혀 없이 전적으로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왜 하나님은 천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또 구속하지 않을 수가 없으셨는가? 그것은 바로 아들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에 의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우리의 미래도 전적으로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마16:25).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땅의 것, 보이는 것이 미혹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인자에게 그가 태어난 후에 나타날 모든 것이 입력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이 노력하고 무엇을 하는 것도 자기 안에 중진 범위 안에서의 노력이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정말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땅의 것을 보면 전도서의 저자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참된 소망과 용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상대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간 전의 은혜’는 시간 안에 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 요인이며, 이 세상을 떠나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3. 나타난(보이는)은혜

 

보이지 않는 것은 나타나고 보이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우주 기계가 하늘과 땅이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아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게 하시려고 ‘주는 기계’인 하늘과 ‘받는 기계’인 땅을 창조하셨다.(골 1:16-18)

 

하늘은 주는 곳이요 땅은 받은 곳이며 하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려오는 곳이고 땅은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채워지는 곳이다. 하늘과 땅의 주고받는 모든 역사는 아들에 의하여,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비밀이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요, 그 안에는 우주의 모든 보화(가치)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말과 운동은 보이지 않는 사랑(생명이 나타나 전달되는 통로이다. 아버지는 사랑이요 아들은 말씀이며, 말씀에는 사랑의 운동력이 있다.

 

천지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말씀으로 붙잡혀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주셨고 우리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으며 아무 형체도 나타나지 않도록 하셨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형상(형체)을 입혀주는 ‘은혜의 기계’이지만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기계'인 것이다.

 

 

 

 

출처 : 우림과 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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