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경적 기독교
제 1 장, 서 론
1, 제목에 대한 설명
1)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뜻이다.
2) 절대진리로서의 기독교라는 뜻이다.
2, 현대 기독교의 문제점
1) 기독교가 무속신앙화 되어간다.
2) 기독교가 신비주의화 되어간다.
3) 기독교가 인본주의화 되어간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 빌 3;7-8 *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적인 최대의 종교로 부각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 하기도 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사상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각양 각색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뚜렷한 객관적 표준을 상실한 채, 각 나라와 개인의 주관적 표준을 따르는 결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다.
세계나 국가는 그만 두고라도 한 지방, 또는 한 가정 안에 있어서까지라도 같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서 신앙과 신학을 달리 할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장이 다르고 신앙생활의 방법이 전혀 판이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한 국가 안에는 수백개에 이르는 교파가 있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혼선 마저 일으키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어져야 하며 이 문제에 대한 해답 역시 반드시 구해져야 한다.
본서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간단 명료하게 제시함으로써 그 우월성과 절대성을 확인하여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서론으로 본 장의 제목에 대한 설명을 하고 현대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 본론적인 내용을 논하려고 한다.
1, 제목에 대한 설명
딤후03: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0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03: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0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03: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본서의 제목은 "성경적 기독교" 이다. 즉,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치를 못하다는데 이 제목으로 정하게 된 동기가 있다.
성경적 기독교라는 말은 그 이면에 성경적이 아닌 기독교도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기독교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사이비 기독교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기독교가 성경적이어야 하는 까닭은 기독교가 성경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의하여 기독교가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1),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뜻이다.
행17: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종교를 국어사전에서는 "무한 절대의 초인간적인 신불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이로 인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 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모든 종교 (Religion)를 일반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종교는 그 특성상 크게 둘로 분류가 가능하다. 그 하나는 철학적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적 종교이다.
철학적 종교는 우주만물과 만사에 대한 인간들의 경험과 사색에 기초하여 인간 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역사 과정 속에서 복을 받으려는 욕구나 진리를 찾으려는 동기로 부터 시작된 무속을 포함한 모든 이방종교를 일컫는 말이다. 이같은 철학적 종교는 경험을 주된 기초로 삼는 무속종교와 사색을 주된 기초로 삼는 이치종교로 구별이 된다.
무속은 무당의 풍속을 말하는데 인간들이 삶의 터전인 자연만물의 위협 앞에 극복보다는 순응하려는 태도로 부터 출발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기잡이하는 어부가 바다의 위협이 있을 때, 자신의 허약함을 느끼고 바다 신에게 무당을 통해 생명의 보호를 의탁하는 행위가 곧 무속종교 행위의 일종이다.
이치종교는 인간이나 역사 그리고 우주와 세계에 있어서의 온갖 이치를 주로 사색에 의해 해결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기인된다. 그 한 예가 인간이 출생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동안의 사색끝에 이치를 터득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동기가 된 경우이다.
결국, 철학적 종교는 무속종교나 이치종교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서, 인간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역사의 산물이며 우상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적 종교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사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에 기초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 주심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음으로부터 출발된 기독교를 의미한다.
혹자들은 기독교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후부터 시작된 역사과정 속에서의 산물로 아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시작시기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역시 이성을 앞세우는 기독교와 계시를 앞세우는 기독교로 분류가 된다.
이성(Reason)은 이치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는 성품이나 합리적 사유 능력을 말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이성기능으로 인간 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여 계시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비판을 통하여 체계화한 진리를 수납하고 믿는 이성적 기독교가 있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는 관계없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진리를 수납하고 믿는 계시적 기독교가 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성을 앞세우는 기독교는 계시종교인 참된 기독교가 아닌 철학적 종교중의 하나인 이치종교와 유사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시적 기독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이성적 기독교는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서도 더욱 그 차이점은 명백하다.
결국 계시적 종교는 명칭상으로는 전체 기독교를 말하지만 실질에 있어서는 이성을 기초로 하는 사이비적인 기독교를 제외하고 일컫는 말이다.
성경적 기독교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철학적 종교가 아닌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뜻이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철학적인 타종교들 보다 우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절대진리로서의 기독교라는 뜻이다.
골02:0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요0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08: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Truth)를 국어사전에서는 "참된 도리, 또는 누구나 인정하여야 할 보편 타당한 지식" 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진리를 주관적이며 보편적인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객관성을 지녀야 하고 절대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관념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분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주관적 진리와 객관적 진리로 분류해서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관적 진리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보편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지식을 말한다. 이 진리인식에 있어서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진리인식의 근본으로 하는 경험론(empiricism)과 인간의 주관적 사색을 진리인식의 근본으로 하는 관념론(idealism)으로 구별이 된다.
경험론은 이론의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인간 자신의 경험을 제일로 하는 경험위주의 진리인식 태도를 말하고, 관념론은 구체적인 현실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관적 가치에 따라 이론화한 추상적 생각을 제일로 삼는 생각위주의 진리인식 태도를 말한다.
경험론은 인간의 경험이 너무도 제한적이며 부분적이기 때문에 진리인식에 있어서 소극적이다 못해 독선에 이르고, 반대로 관념론은 인간의 추상적인 관념의 범위가 너무도 크고 넓다 못해 그 한계를 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진리인식에 있어서 적극적이다 못해 궤변(sophism)에 이르게 된다.
결국 주관적 진리체계인 경험론이나 관념론은 모두가 인간 자신의 주관적 경험이나 생각을 진리인식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독선 아니면 궤변에 빠지게 된다.
객관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이나 사색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독립되어 있는 진리를 말한다. 이같은 객관적 진리는 관념론과 계시론으로 구분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관념론(objective idealism)은 관념의 타당성을 보편적인 주관이나 의식에 둠으로써 객관적 의의를 가지게 하지만, 객관적 계시론(objective revelatism)은 계시의 타당성을 절대적인 주관이나 의식에 둠으로써 객관적 의의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념론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어서 정치, 교육, 경제, 문화 등의 변동에 따라 보편적인 주관이나 의식이 변하기 때문에 관념 역시 변할 수 밖에 없다. 하나의 예를 들면, 유교적 문화권에서는 여필종부 사상이 보편적인 주관이나 의식으로 받아 들여지지만 서양문화권 아래서는 남녀동등 사상이 보편적인 주관이나 의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관념론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절대적 진리체계는 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 계시론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이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변함이 없는 영원한 절대진리의 체계인 것이다.
결국 객관적 진리체계인 관념론이나 계시론은 모두가 객관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관념론은 보편적 주관에 의한 상대적인 객관성을 가진 가변적 철학적 진리체계에 불과하고, 계시론은 절대적 주관에 의한 객관성을 가진 불변적 종교적 진리체계인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라는 것은 바로 주관적 진리의 종교가 아닌 절대적 주관에 의한 객관적 절대진리로서의 기독교라는 뜻이다. 그것은 절대적 주관에 의하여 계시된 성경은 영원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사색이나 경험에 의한 철학적인 타종교들 보다 우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현대 기독교의 문제점
요일02:18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요일02:19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 내지는 변질까지 시키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역시 오랜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화는 물론 변질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변질된 기독교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역사적인 거사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벌써 5세기가 가까워 온다. 그동안 시간의 흐름과 함께 기독교는 본래의 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하치장에 버려진 타락한 역사의 쓰레기로 장식되고 오물들로 채색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문제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1), 기독교가 무속신앙화 되어간다.
요04: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04: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종교적 신앙을 크게 분류하면 계시신앙과 무속신앙으로 정리된다. 이 구별은 신앙의 방법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원리에 있어서까지 확연히 구별된다.
계시신앙은 신의 계시를 깨달아 알고 믿는 신앙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곧 계시신앙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계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신앙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인간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자기 신념의 작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성경)를 통하여 얻어지는 하나님 지식으로부터 결과되는 산물이다.
특별계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고 바르게 해석만 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자비하심 등의 영광을 알게 되며, 이렇게 알게 된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불러 일으켜준다. 이러한 신앙이 곧 계시신앙이며 기독교의 순수한 참 신앙이다.
무속신앙은 무당의 풍속에 따르는 신앙을 말한다. 특히 자연신을 숭배하는 원시적 종교의 신앙을 말한다. 이 신앙은 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기않고 삶 속에서 대하는 자연의 사물 현상을 신으로 알고 숭배하는 우상신앙인 것이다.
무속신앙의 특징으로는 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는 무관하게 신에게 정성스럽게 공을 쌓기만 하면 신이 복을 내려준다는 막연한 관념으로부터 출발이 된다. 그러므로 무속신앙은 맹목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무지가 만들어낸 원시적 맹신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연을 접하며 살아가는 동안 자연으로부터 위협을 느낄 때 막연한 신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이같은 신의식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간내면 속에 형성되는 심리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기독교는 무속적 신앙을 가진 자들의 군집으로 변해가고 있다. 표면상으로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이들 대부분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능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생각보다는, 정성을 잘 드려서 많은 복을 받아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더 많다는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복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지상적이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이스라엘 열조와 그 백성들에게 약속도 하시고 이루어서 누리게도 하셨다. 그러나 이같은 복은 신약교회 성도가 누려야 할 신령한 복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천상적이며 내세적이고 신령적인 복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복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경외하게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시는 것이다.
기독교 계시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육간에 받은 바 복을 깨닫고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신앙인데 반하여, 원시적인 무속신앙은 알지도 못하는 신으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 신에게 정성스런 공을 드리는 신앙이다.
기독교적 계시신앙과 원시적인 무속신앙은 그 원리나 성질면에 있어서 판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도 현대 기독교 교회 안에 원시적인 무속신앙이 체계화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를 안고 있다.
2), 기독교가 신비주의화 되어간다.
엡03:02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엡03:03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엡03:04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03:05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엡03:06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신비(Myster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보통의 이론이나 인식을 초월한 영묘하고 이상야릇한 비밀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비는 그 특성과 내용에 있어서 복음적 신비와 세속적 신비로 엄격하게 구별이 된다. 이같은 신비의 두 부류는 공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도 오늘의 교회 안에 엄연히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복음적 신비는 기독교 진리의 내용을 특성있게 표현하는 말이다.
기독교 진리체계인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비밀을 계시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에 계시된 복음적 신비의 진리를 믿는 종교라는 점에서 신비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적 신비는 아직도 알 수 없이 가리워진 신비가 아니라 이미 계시되었고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알려진 신비이다.
복음적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대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알게 해 주셨고, 사도들을 통하여 교훈하시고 약속해 주심으로 완전하게 드러내어 주신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복음적 신비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보고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알려진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확증이 되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성령에 감동된 사도들의 교훈과 약속들을 통하여 알려진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승리와 통치를 통하여 확증이 된다.(엡 3;8-9)
세속적 신비는 비복음적 신비를 통칭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세속적 신비란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고 비기독교적이다.
세속적 신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원리나 사리에 있어서 경이롭게 불가사의 한 것으로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예를 들면, 마술이나 최면술, 또는 기사, 환상, 음성, 예언, 방언, 입신, 진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세속적 신비들은 모두가 인간의 경험을 기초로 전해지는 신비들이다. 그리고 이같은 신비들은 무속종교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무속신앙가들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신비들이다.
특히 미개한 원시종교에서 주로 행해지는 신앙행위들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특별한 진리체계나 논리적인 근거도 없이 오랜동안의 심신 연마를 통하여 체득되는 신비로운 경험들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살후 2;6-13)
성경을 통하여 계시되고 알려진 복음적 신비의 기독교 진리가 세속적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더렵혀지고 변질되어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피조된 인간이 알아야 하고 또는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은 일점 일획도 더하거나 덜함이없이 완전 충족하게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다만 아직 과학으로 알아내지 못한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신비만이 가리워진 채 남아 있을 뿐이다. 이같이 가리워진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신비가 세속적 신비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사 40;12-14)
기독교는 가리워진 세속적 신비를 찾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알려지고 찾아진 신비의 진리를 믿는 종교이며 기독교 신앙은 무지해서 맹신하는 신앙이 아니라 깨달아 알고 확신하는 신앙이다.(딤후 3;13-15)
현대 기독교 안에는 소위 성령운동, 기도원운동, 부흥회, 은사집회 등 다양한 명칭아래 세속적 신비에 해당하는 기괴한 행동들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3), 기독교가 인본주의화 되어간다.
갈01:0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01:0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01:0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갈01:0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현대 기독교의 내면을 자세히 살펴 보면 철저히 신본주의적이기 보다는 인본주의적인 요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오랜 역사와 함께 많이 변질되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인본주의화 된 기독교를 신본주의화 시키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교회는 철저히 인본주의화 된 교회인 반면에 개신교(Reformed Church)는 철저히 신본주의화 된 교회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차이점 때문에 구교와 신교는 서로가 갈라서야만 했으나 문제는 철저히 신본주의 바탕에 세워진 개신교안에 인본주의가 싹이 돋는 정도를 지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결실기에 이르고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신본주의적인 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기본 원리로 한 계시중심 신앙을 지향한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목적으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근본 원리를 따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 신앙하는 계시중심신앙을 지향하는 것이 신본주의적 기독교이다.
인본주의적 기독교는 신본주의적 기독교와는 달리 인간의 자율(autonomy)과 인간의 행복(happiness)을 기본 원리로한 이성중심 신앙을 지향한다. 즉 인간 자신의 자율적 능력에 의하여 인간 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이상세계(Utopia)를 이룩할 수 있다는 근본 원리를 따라 인간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르는 이성중심 신앙을 지향하는 것이 인본주의적 기독교이다.
모름지기 개신교를 중심한 현대 기독교 안에 인본주의적 신앙요소가 깊숙히 자리하고 있어 위험 수위를 높혀가고 있다. 소위 자칭 정통보수교회라고 자처하는 교회 안에도 인본주의적 신앙요소의 독소가 깊이 침식되어 교회의 심장부를 부패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아닌 인간의 열심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인간의 공로주의적 의가 강조되며,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아닌 인간의 욕망에 의한 계획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적 판단이 아닌 타락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강조되는 개신교 내부의 인본주의적 독성에 의한 부패상을 문제삼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 기독교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는 반드시 극복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교수대 위에 올려놓은 현대인,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역사 밖으로 추방시켜 버린 현대인,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망령든 무능한 노인영감으로 치부해 버린 현대인과 현대 기독교는 당연히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응분의 형벌은 반드시 가해져야 한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반드시 철저하게 극복되어져야 한다.
엡01:03찬송하리로다 !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01:0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01:0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01:0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제 2 장, 기독교 성경관
1, 성경관의 중요성
1) 역사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2) 교리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2, 성경의 필요성
1) 하나님을 아는데 필요하다.
2)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
3, 성경의 내용
1) 하나님의 언약 내용이다.
2) 하나님의 성취 내용이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벧후 1;20 ~21 *
앞서 서론에서는 기독교가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어야 하는데 현대 기독교는 성경적이지를 못하고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이렇게 지적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객관적인 기준이 설정되지 않으면 각자의 주관에 따른 주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비생산적 토론에 머무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곧 기독교 진리의 기준이 된다. 현대 기독교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진리의 기준이 흔들리는데 있고, 진리의 기준이 흔들리는 원인은 성경관이 분명하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혼미를 거듭하는 현대 기독교를 위기의 늪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기독교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선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관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다음은 성경의 필요성에 이어 성경의 내용을 대략 정리해 봄으로써 올바른 성경관 정립을 꾀하려 한다.
1, 성경관의 중요성
딤전06:0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딤전06:0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전06:0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성경과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성경없이 건전한 기독교는 기대할 수 없고 성경대로 믿는 신앙만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가 점점 사이비화 되어 가는 근본 원인은 성경관에 대한 오해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성경관의 중요성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겠으나 역사적 측면과 교리적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1) 역사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딤후04:0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04:0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04:0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엄밀하게 따지자면 기독교 역사는 예수 초림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분류된다. 예수 초림 이전의 유대교는 기독교의 모형과 그림자였다면 예수 초림 이후의 기독교는 모형과 그림자가 아닌 실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성경관의 중요성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피는데 있어서는 예수 초림 이후의 약 2 천여년 간의 교회사만을 그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기독교가 약 이천여년 간의 역사를 흘러 오면서 오늘의 모습으로 탈바꿈 되어지기까지는 대략 5 세기를 주기로 해서 매우 중요한 교리적인 투쟁이 있어왔다.
기독교 초기에는 기독론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시대였다. 그 논쟁의 초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였다.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결론과 함께 여타의 주장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말았다.
중세 전기에는 교회론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시대였다. 4 세기 콘스탄틴 로마 황제의 기독교 자유선언과 함께 로마교회의 비대화에 힘입어 교회관의 논쟁은 가중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회관에 대한 논쟁들이 있기는 했었으나 4 세기를 지나 6 세기 후반, 로마교황 그레고리 I 세 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에 오르기 시작하여 11 세기 중엽 동서교회의 분리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 전례없이 치열했던 시대였다.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새로운 학문운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스콜라신학(Scholasticism)에 힘입어 교황권위의 상승과 함께 전형적인 구원론 교리가 구체화 되었다. 스콜라신학에 있어서의 구원이란, 은혜의 분배자인 교회가 성례를 통하여 실재론적 은혜를 베풀어 주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구원론에 대한 논쟁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라는 말씀에 힘입어 일어난 16 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을 기점으로 최고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근세에 이르러서는 성경관에 대한 논쟁이 끊일줄 모르고 계속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로마교회 교황의 권위 대신 성경의 권위가 최고에 달한 시기였다.
그 후 개혁운동의 열기가 식어져가면서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가하기 시작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의 절대 진리라는 사실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각종 종파들이 파생되게 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신학적 주장이 속출하게 되고 잡다한 신앙형태의 사이비적 신앙운동이 현대 기독교를 강타하게 된 것이다.
현대 기독교 안에 크게 형성된 성경관은 여러가지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각각 그 특성을 따라 몇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성경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외에도 로마교회가 만든 교리나 교황의 메시지와 같은 것, 또는 신비주의자들이 받은 계시나 예언 등의 내용이 모두가 성경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다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들 견해에 의하면 성경 66 권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가운데 비과학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비도덕적인 것, 또는 전설이나 신화 등을 제외한 더러의 내용들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이다.
그 다음은, 성경은 기독교 경전이라고 하는 신복음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이들 견해에 의하면, 종교의 각 종파마다 경전을 가지고 있듯이 기독교도 성경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은 성경을 불교의 대장경이나 유교의 사서 오경, 또는 회교의 코오란과 같은 경전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다.
마지막은, 성경만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정통 보수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이 견해는 가장 성경적인 견해로서 신구약 성경 66 권은 일점 일획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는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올바른 성경관이 점점 퇴색되어져 간다는데 있다.
㉠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 스콜라 신학, 신비주의신학.
㉡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다 - 인본주의신학.
㉢ 성경은 기독교 경전이다 - 신복음주의신학.
㉣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 정통보수 개혁신학.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올바른 성경관 정립은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역사적 측면에서 볼때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것이다.
2), 교리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벧후01:20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0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기독교 교리와 성경관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성경관에 의하여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교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리가 달라진다는 것은 곧 신앙이 달라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근원으로 하는 것인데 성경의 해석여부에 따라 신앙이 달리 나타나고 그 신앙의 결과로 신앙의 조항들인 신조가 이루어지며 그 신조를 구체화 해서 하나의 논리적 체계를 이루므로 교리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판이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교리체계가 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 이성을 기초로해서 만들어지는 경우이다.
기독교 교리사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성경관이나 성경해석에 대한 견해에 따라 여러가지 주장과 논리형태의 교리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신약교회 초기에는 사도시대 이후 속사도들이나 교부들은 비교적 사도적 신앙을 유지 발전시켜 오면서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에 기초하여 신조를 만들어 가르치고 교리화하는데 주력을 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미숙한 부분도 많고 해석방법 역시 미숙했기 때문에 신조나 교리상 미숙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데는 아주 철저했다.
중세기에는 교리의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기독교 신앙의 암흑시대였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1세의 즉위와 함께 중세 카톨릭의 전형적인 교회중심 또는 교황중심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초로 삼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세 카톨릭의 변형된 특유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아닌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같은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신학이라기 보다는, 한낱 인간 이성의 산물인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교리제조 작업은 11세기에 일어난 스콜라 신학운동이 더욱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이 신학 운동의 주된 과제는 첫째가 교회 교리와 인간 이성을 조화시키는 일이고, 또 하나는 교리를 체계화 시켜 하나의 완전한 신학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참고 딤전 6;20)
중세시대의 교리형성에 있어서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 된 근본 원인은 성경관의 오해에서 찾을 수 있다.(마22;29)
근세에 이르러서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올바른 성경관의 재정립과 더불어 성경해석학의 발전이 이루어져서 상당히 건전한 성경해석이 가능해지면서 성경에 근접한 교리가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서 하나님 절대주권 중심, 하나님 영광중심의 방대한 개혁신학 원리가 잡혀지게 된 것이다. 이 작업은 종교개혁자 루터(Luther)이후, 죤 칼빈(John Calvin)에 의하여 구체화 되고 발전 계승 되었다.
특히 죤 칼빈의 성경강론과 그의 기독교강요 저술은 건전한 기독교 교리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것이다. 이같은 눈부신 업적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성경관의 바른 견해에서 기인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서 성경관의 다양한 변화와 더불어 성경해석학에 대한 견해 차이로 신앙의 형태는 물론 신조 및 교리가 달라지고 따라서 신학의 혼돈시대를 맞아 현대 기독교는 미궁을 헤매여야만 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초세 - 성경 ⇒ 해석 ⇒ 신앙 ⇒ 교리 ⇒ 초대교회
중세 - 이성 ⇒ 교리 ⇒ 신앙 ⇒ 성경 ⇒ 로마카톨릭
근세 - 성경 ⇒ 해석 ⇒ 신앙 ⇒ 교리 ⇒ 개혁교회
이상에서 살펴 본 바대로 성경관은 교리적 측면에서 볼 때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매우 큰 것이다.
2, 성경의 필요성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요 20;31 *
올바른 성경관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성경의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필요성을 깨닫는 만큼 성경의 가치로움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건전한 기독교는 왜 성경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필요성이 고찰될 수 있겠으나 인간측면에서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그 해답을 구해 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을 아는데 필요하다.
롬 1;20 ~ 23"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게치 못 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물론 신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하여 불가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는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만나 대화도 하고 만나도 볼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인간을 지어 놓으셨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분부를 어기고 불순종한 결과 타락하여 저주의 몸을 입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대면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나타내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피조된 세계에도 저주가 덮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게 되었고, 따라서 피조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서의 성경이 인간에게는 절대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계시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계시의 성질상으로 보아 하나는 일반계시이고 또 하나는 특별계시인 것이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일반적인 모든 섭리를 통하여 주어지는 계시를 말한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과 하늘,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그리고 해, 달, 별 등 온갖 천체와 이들에 대한 생성과 운행 등을 들 수 있다. 이같은 것들은 일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인간 누구나가 받아들일 수 있기는 하지만 저주가 덮혀진 상태라서 일반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계시는 아니다.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와는 달리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계시인데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일찍이, 철학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철학이 자기 나름의 신을 만들어 내기는 했으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 신지식을 얻지는 못했다. 도리어 후대에 이르러서는 철학이 신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꺼리는 상황까지 이르고 말았다. 알고보면 철학이란 일반계시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계시의 자료들이 모두가 저주가 덮혀지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신에 대한 참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지식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특수한 방법에 의하여 생령으로 하나님의 형상따라 지은바 된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지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렇게 지식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대상은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 누구도 하나님을 아는 근본적인 지식 없이는 어떠한 참 지식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에 대한 부분적인 토막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분적인 토막지식은 참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경(특별계시)을 깨닫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기독교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소망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닫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성경)가 글로 이루어지기 전에도 인류 가운데서 구원할 자들에게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을 특별히 계시해 주셨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의 아담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고, 아벨에게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열납해 주셨고, 에녹에게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셨고, 노아에게는 방주를 통해 홍수에서 구원해 주셨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그 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으며 신약계시 시대에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직임을 수행하심으로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모두가 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특별한 계시이다. 이러한 특별한 계시의 내용을 문서화한 것이 곧 신구약 성경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에 이르는데는 특별계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복음의 사건으로 절정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완성시키셨다. 그 후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특별계시는 주시지 않는다. 그것은 일점 일획도 더하거나 덜하지 못하도록 분부하시리 만큼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얻기에 완전하고 충족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 이 외에 또 다른 특별계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에 이르려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히 4;12),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딤후 3;17)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은 성경 내용이 하늘의 신령한 지혜, 즉 특별계시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이며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늘로서 온 참 지혜이신 예수를 아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요 17;3)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이며 영생이라는 말이다.(요 5;39 참고)
기독교는 철저히 지식의 종교, 또는 지혜의 종교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신앙하는 무지한 맹신의 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 또는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지식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하기 때문에 구원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성경의 필요성이 절대적이다.
성경의 필요성
㉠알고 믿어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구원얻게 하는 유일한 계시이므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므로
※ 구원방법 - 특별계시(성경) → 신지식 → 신앙 → 구원(영생)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에 이르는 종교인데 특별계시인 성경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계시이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므로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성경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3, 성경의 내용
눅 24;44 ~ 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기독교 성경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데 있어서 성경의 구체적인 내용을 개괄적으로라도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성경 자체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올바른 성경관이 정립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대로 성경관의 중요성이나 성경의 필요성 등을 통해 이론적으로 아무리 논리를 전개해간다 할지라도 성경 내용 자체의 확실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면 모두가 무모한 일이 되고 만다. 도대체 성경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져 있기에 그렇게 중요하기도 하고 그렇게 필요하기도 하다는 말인가?
신구약 성경은 얼핏 보기에는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신약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행적과 교훈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수님과 사도들의 행적과 교훈의 차원을 넘어선 심오한 신적 계시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성경을 누구나 옳게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 그의 능력과 권능을 믿고 찬양드리지 않을 자가 없고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신비로운 능력을 담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섭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1) 하나님의 언약 내용이다.
출 6;2 ~ 5"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할 것과 땅을 정복할 것과 바다나 공중이나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릴 것 등을 명하시므로 언약하신 것이다.(창 1;28)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고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과 관계없이 아담에게 복으로 주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불러 내어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이 번창할 것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을 주실 것과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어 다스리게 하실 것 등을 복으로 언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빠짐없이 다 이루어 주셨다. 이것은 아담에게 언약하신 것은 아담이 비록 타락을 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모형적이며 그림자적이요 현세적인 것으로 언약하시고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 내용이 소위 구약의 역사서이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자손과 땅과 통치를 언약하시고 그 후손을 보호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열조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들은 하나하나 차례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의 내용은 이스라엘 열조에게 자손들의 번창을 복으로 주신 첫번째 언약을 성취해 주신 섭리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여호수아나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살도록 복으로 주신 두번째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주신 내용이다.
룻기에서부터 에스더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다스릴 것을 복으로 주신 세번째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에서부터 에스더까지 구약의 역사서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가지 복으로 언약하신 것들을 모두 다 성취해 주신 섭리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등은 일반적으로 구약의 성문서라고 한다. 이같은 성문서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언약하신대로 자손을 번창케 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시고 다윗왕조를 세워 다스리도록 성취해 주신 하나님을 구약의 성도들이 찬양한 내용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권세도 주관하시며, 욥을 망하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시는 전능자이심을 찬양한 내용이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언약하신 것들을 다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구약의 성도들이 찬양한 내용이다.
잠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언약하신 대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게 하시는 참 주권자 되심을 솔로몬 왕이 찬양하는 내용이다.
전도서는 인간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헛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이루시는 행사는 영원하심을 솔로몬이 찬양한 내용이다.
아가는 하나님께서 한번 이스라엘 열조에게 하신 사랑의 언약은 절대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솔로몬이 찬양한 내용이다.
욥기에서 아가까지 구약의 성문서에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구약의 성도들의 찬양이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에 이르는 선지서는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나타나실 하나님을 선지자들이 예고해 준 예언서들이다.
이사야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때리시고 싸매어 주신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야에는 하나님께서 멸하시고 남겨 주신다는 것을 백성에게 예레미야가 예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겔에는 하나님께서 흩으시고 모으신다는 에스겔의 예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에는 하나님께서 헐으시고 세우신다는 다니엘의 예언의 내용 등이 기록이 되어 있으며, 그 외에 호세아에서부터 말라기까지의 선지서들도 모두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과 같은 선지서 내용들과 흡사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역사서나 성문서 또는 선지서 등 구약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하신 것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없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섭리와 구약성도들의 찬양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언약하신 내용이다. 따라서 이들 모든 언약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2) 하나님의 성취 내용이다.
요 19;28 ~ 30 "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러 모양으로 주어진 언약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에게로 집약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본래의 언약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없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다. 이렇게 이루실 것을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섭리나 찬양, 또는 예언 등을 통하여 언약해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언약에 대한 성취 내용으로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 자신과 그가 승천하셔서 오순절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보내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사복음서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서 언약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직임을 중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직임은 세가지가 있는데 선지직, 왕직, 제사직 등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가지 직임을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자세히 증거해 준다. 따라서 마태복음에는 구약의 예언대로 이루신 예수님, 선지직을 수행하시는 예수님, 왕직을 증거하시는 예수님, 제사직을 감당하시는 예수님 등이 소개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중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신분에는 낮아지심의 신분과 높아지심의 신분이 있는데 마가복음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하여 자세히 증거해 준다. 그 내용은,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가 다시 영광스러운 신분의 소유자가 되셨다는 것으로 요약이 된다. 이러한 신분으로 보아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이시다고 마가복음은 증거해 준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 준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구속주로서 주로 속죄사역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구속주로서의 사역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속죄주되심과 속죄능력 및 통치능력에 대한 것과 천국에 대한 교훈, 그리고 속죄주로서의 임무 수행에 대한 증거들이 자세히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본성을 중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신성이시다. 즉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직임과 신분과 사역과 본성 등을 들어서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서 언약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사실을 확인했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에는 승천하신 예수께서 오순절에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사역과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셔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이 구약에서 언약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 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성령세례 주실 것과,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실 것과 세상 마지막 때에 재림하실 것 등이다. 이 약속들 가운데 성령세례는 오순절날에 이루어졌고, 땅 끝까지 복음증거는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고, 예수님 재림은 장차 이루어질 약속들이다.
로마서에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의 바울서신은 세워져 가는 교회를 성령께서 바울사도를 통하여 진리로 먹이셔서 견고하게 자라도록 해 주시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해 준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머릿돌이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견고하게 자란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히브리서에서부터 유다서까지에는 예수님의 복음만이 참 진리이며 참 생명임을 강조하면서 모든 거짖과 이단을 경계하여 싸울수 있도록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훈하시고 경계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려 오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과 비진리 그리고 이단과의 싸움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선한 싸움에 대한 최후 승리의 모습이 장엄하게 소개된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선한 싸움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보살피시고 세상 끝날에 심판을 통해 모든 불의의 권세, 사단의 권세들을 진멸하시고 최후에 승리를 거두신 후 영원토록 통치해 주실 자이심이 요한계시록에 증거되고 있다.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구약에서 언약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다. 참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성령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고 신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다시 한번 총 정리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신 증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결국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이다.
제 3 장, 기독교 신관
1, 하나님의 속성
1) 하나님은 전능성을 가지셨다.
2) 하나님은 성실성을 가지셨다.
3) 하나님은 주권성을 가지셨다.
4)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지셨다.
5) 하나님은 자비성을 가지셨다.
2, 하나님의 사역
1) 하나님은 모두를 작정하셨다.
2) 하나님은 인간을 예정하셨다.
3) 하나님은 작정을 이루신다.
4) 하나님은 예정을 이루신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
* 사 42:5 ~ 9 *
기독교 성경관을 분명하게 밝힌 다음, 기독교 신관을 논하는 것은 논리상으로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관이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통하여 정립된 신관, 즉 성경적 신관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나라마다 또는 지역마다 그 문화나 정치, 교육 등의 여건에 따라 서로가 다른 다양한 신관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한 나라나 같은 지역에서도 개인에 따라 역시 서로가 다른 각양 각색의 신관은 물론, 같은 종교를 가진 신자들 간에도 전혀 다른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철학적 바탕에 의하여 주관적인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신관들은 모두가 주관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적 신관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특별히 계시하신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정립된 성경적 기독교 신관만큼 정확한 신관은 있을 수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등을 하나님의 사역이나 교훈으로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에는 창조 기사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계시되어져 있고,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사건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확실하게 증거되는 계시가 기록되어져 있다.
1, 하나님의 속성
시 136:1 ~ 5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성경적인 기독교 신관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attibute) 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다음에 언급될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속성은 여러가지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도 있겠으나 성경에 계시된 대표적인 몇 가지 속성만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기독교적 신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구약성경 가운데 특히 성문서에 속한다고 하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등은 창세기로부터 에스더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섭리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특징있게 나타내어 찬양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전능성을 가지셨다.
욥 42:1 ~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찬양은 욥기에 강하게 나타난다.
욥은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심도깊게 발견하였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생애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전능성을 높이 찬양한 것이다.
이러한 욥의 찬양은 이스라엘 역사섭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능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타락하여 범죄하는 인간들 때문에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을 삼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국민)과 땅(국토)과 통치(국권)를 약속하시고 천년세월을 통하여 아브라함 후손에게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나하나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자손을 번창케 하실 때에도 이삭의 출생과정을 비롯해서 애굽에서 사백년동안 종살이와 학대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번창케 하셨고 광야 사십년동안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으로 번창케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두번째 약속인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요단강을 갈라서 건너게 해 주셨고 가나안 첫성 여리고성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 뜨려서 정복하도록 해 주셨다.
그 외의 도성들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차츰 정복하도록 하여주셨고, 사사시대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사들을 통하여 가나안 족속이나 이방민족들을 쳐서 승리하고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섭리하여 주셨다.
세번째 마지막 약속인 통치자를 세우실 때에도 이새의 아들인 어린 다윗을 들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이게 하고 승리를 거두도록 섭리하셨고, 백성들의 요구로 세워진 사울 왕가를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고 유다지파인 다윗을 왕위에 오르게 하셔서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기를 꺼져가는 등불을 마져 끄지 아니하시는 것같이 하셨다.
사울왕이 망한 후에도 많은 대적들이 나타났으나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모두 멸해 주시고 다윗왕가를 굳게 세워 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신 특별계시 섭리의 역사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배경삼아 문학적으로 표현된 욥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욥기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능력의 한계가 무한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순전한 욥을 이유도 없이 사단에게 내어 주어서 망하게도 하시고 다시 흥하게도 하시는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단도 인간의 생사 화복도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전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대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결과에 이른다.
2) 하나님은 성실성을 가지셨다.
시 89:1 ~ 4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 (셀라)
하나님의 성실성은 주로 시편을 통하여 찬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의 찬송 주제를 말하라면 단연코 하나님의 성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성실성을 찬양하기 위해
1편과 2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언약을 찬양하고,
3편에서 89편까지에서는 하나님께 언약하신대로 구원해 주시라는 간구를 통하여 찬송하며,
90편에서 150편까지에서는 하나님께서 간구를 들으시고 언약대로 구원해 주신 은혜를 찬송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한번 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성실하신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시편의 찬양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손과 땅과 통치를 언약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주셨다.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손 번창기, 땅 정복기, 열왕 통치기 등 3기로 분류가 가능하다.
자손 번창기는 야곱시대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요단동편에 머무르고 있을 때까지를 말하고,
땅 정복기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로부터 삼손 사사가 죽음으로 불레셋을 멸하고 승리를 거둘 때까지를 말하며,
열왕 통치기는 사울왕 패망 후, 다윗왕의 즉위로부터 시작해서 솔로몬왕 말기에 있었던 남북왕조의 분열을 거쳐 앗수르 제국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패망과 파사왕 고레스로 인한 남쪽 유다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회복까지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들과 언약하신 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섭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자손 번창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하신 자손 번창에 대한 언약을 이루어 주신 역사섭리이며,
땅 정복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어 주신 역사섭리이고,
열왕 통치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다스리게 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어 주신 역사 섭리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며 성실하신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 하다가 아니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와시며 성실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3) 하나님은 주권성을 가지셨다.
잠 16:1 ~ 4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주권성은 주로 잠언에서 강조되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잠언은 솔로몬왕이 깨달은 지혜를 아들에게도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교훈해 준 내용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하나님의 주권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악에서 구원을 시키시고 하나님을 아는 명철로 나라를 세우시며 세워진 나라를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다스리시는 진정한 주권자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잠언 1장에서부터 9장까지에서는 지혜로 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10장에서부터 24장까지에서는 명철로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며
25장에서부터 31장까지에서는 나라를 형통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솔로몬왕의 잠언은 솔로몬왕 자신의 통치기간을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그 내용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부터 자손이 번창하여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워 다윗왕조가 세워지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섭리되고 이루어진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와의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일방적인 명령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주시는 것도 이스라엘의 열조들이나 자손들의 의견이라든가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절대적 주권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와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 언약 성취 역사라는 점에서 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하시고 주권적으로 이루어 주셨다는 이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하나님의 주권성을 크게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왕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역사섭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성을 발견하고 잠언을 통하여 아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교훈한 것이다.
솔로몬왕은 자기의 뒤를 이을 아들에게 진정한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깨닫게 해줌으로써 다윗왕조가 굳게 세워지는 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로서 우주와 만물의 섭리는 물론,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영원한 작정과 예정에 의하여 주권적인 능력으로 주관하시며 섭리하신다.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소립자나 세균으로부터 시작해서 우주에 이르는 크고 작은 모든 것들과, 작은 먼지의 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천체의 운행에 이르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
4)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지셨다.
전 3:11 ~ 14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전도서에 잘 나타난다.
전도자 솔로몬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해 아래에서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됨을 거듭 강조하였다.
전도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인생들이 해 아래 살면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일들은 헛되고 헛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잘 되게 하시고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하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참된 본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전도서 1 장에서부터 4 장까지에서는 영원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한 다음
5 장에서부터 7 장까지에서는 하나님을 영원히 경외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8 장에서부터 10 장까지에서는 영원히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11 장에서부터 12 장까지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를 영원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므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솔로몬의 전도서는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안에서 영원한 일을 영원토록 섭리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특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계시되었다.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이 되어 다윗왕국이 세워지게 된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며,
세워진 다윗왕조가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존속되는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자를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며,
다윗왕조를 떠나 북쪽 사마리아로 가서 나라를 따로 세운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였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섭리는 모두가 영원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모형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경외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자기 백성을 영원히 형통케 하시는 분이시며,
선악간에 영원한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솔로몬의 전도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섭리를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로서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영원성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시공의존자로서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구비한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
5) 하나님은 자비성을 가지셨다.
아 8:6 ~ 7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자비성은 솔로몬의 아가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솔로몬은 지극한 하나님의 자비성을 자신의 애인인 술람미 여인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아가의 내용을 간단하게 간추려 보면,
솔로몬왕이 햇빛에 검게 타고 거친 살결을 가진 술람미 여인과 조건없이 사랑을 약속하고 결혼한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가 서로 헤어져 잃어버리게 되자 신랑과 신부는 서로 찾아 헤매이면서도 사랑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고 신부는 많은 상처와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래도 신랑은 신부를 다시 찾아 상봉하게 되자 신부는 신랑을 다시 맞이할 행복의 꿈을 꾸게 된다.
솔로몬의 아가 초반부에는 술람미 여인과의 처음 사랑의 언약이 노래되고,
중상반부에는 술람미 여인과의 영광스러운 혼인잔치가 노래되며,
중하반부에는 신랑과 신부가 헤어진 상태에서 서로 사모하며 사랑하는 내용이 노래되고,
하반부에는 신랑이 신부를 다시 찾아 만나서 시도하는 사랑의 꿈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솔로몬의 노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열조들에게 백성 삼아 주실 것을 언약하셨다.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셔서 보호하시고 지켜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섭리는 솔로몬왕의 아가를 통하여 묘사되고 찬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경우에도 사랑하시며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불변적이시다.
그러므로 아무런 조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편에서 일방적이시다.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사랑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하여 주신다.
아버지는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나 아버지를 떠나 돼지우리에 있을 때나 아버지 사랑을 깨닫고 다시 돌아왔을 때나 항상 사랑했고 끝까지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에게 위로와 징계로 나타내신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사랑의 위로를 통해 형통함을 주어 기뻐하게 하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사랑의 징계를 통해 곤고함을 주어 생각하게 하신다.
형통해서 기쁠 때에는 찬송하게 되고 곤고해서 생각할 때에는 기도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인간에게 평강(행복)으로 응답된다.
2, 하나님의 사역
시 111:1 ~ 10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전능성, 성실성, 주권성, 영원성, 자비성 등의 속성들이 그의 사역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나타낸 것(계시)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와 만물, 그리고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진행 등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해 가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든지 어느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닌 것은 없고 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모두를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특별계시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을 성경에서 알게해 주신 내용만을 요약해서 정리하겠다.
1) 하나님은 모두를 작정하셨다.
사 46:9 ~ 1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만물과 만사 모두를 작정(divine decrees)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성과 전능성에 의한 사역이시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 크기나 모양, 또는 용도나 성질 등을 비롯해서 창조해놓으신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과정에서 일어날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창세전에 모두를 작정하신 것이다.
이에 대한 개혁파 장로교 교회는 "하나님의 작정은 자기 의지의 도모에 의한 결정이니 그는 이로써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무릇 되어가는 일을 선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7) 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파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부족의 결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한 실제적 실현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앞서 성경관에 대하여 언급하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살핀 바가 있다.
성경이 크게 언약과 성취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계획을 창조와 섭리로 실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종말을 처음부터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창세전에 모든 것을 작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사 46:10)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이루어 나아가실 것에 대한 그의 언약은 그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 이론 가운데 우주의 모든 일, 특히 인간 의지는 항상 어떤 외적인 힘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필연론 또는 결정론(determinsm) 이 있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섭리가 철학적 결정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으나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적 결정론은 작정의 주체가 진행 과정에 있어서의 의미나 진행 목적 등은 알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섭리는 작정의 주체나 의미나 목적 등이 분명하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
2) 하나님은 인간을 예정하셨다.
엡 1:3 ~ 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섭리는 작정섭리 안에 포함이 된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 서로 혼동이 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만물과 만사에 대한 총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하나님의 작정섭리가 성경적인 진리라면 하나님의 예정섭리 역시 성경적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구원할 자들을 선택해서 예정해 놓으셨다.(엡 1:4 ~ 5)
따라서 구원하시기로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은 진멸하시기로 버림을 당할 불택자들로 예정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창세기 첫머리에서부터 확실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가인은 버리시고 아벨은 취하셨다.
그후, 아벨을 대신한 셋과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등의 계통은 취하시고 나머지는 버리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삼아 큰 민족을 이루어 지상에서 유일한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삼으셨다.
그리고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야곱의 12 아들들 가운데 유다지파를 선택해서 이스라엘의 왕조를 삼으시고 아브라함과 유다지파에서 태어난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창세 전에 택한 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섭리 역시 하나님의 전능성과 주권성에 의한 사역이시다.(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하면 "기독교 예정론" 을 참고 할것)
철학적인 이론 가운데 사람은 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론 또는 운명론(fatalism) 이 있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섭리가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기독교 예정론과 철학적 숙명론이 비슷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그 내용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예정론은 예정의 주체와 섭리과정에 있어서의 의미와 예정섭리의 목적 등을 너무도 분명하게 성경에서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 숙명론은 숙명의 주체는 물론 진행과정에서의 의미 또는 숙명적 진행의 목적 등을 랑 수 없을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3) 하나님은 작정을 이루신다.
사 14:24 ~ 27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며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작정을 이루시는 결과이며 과정이시다.
지구는 물론이고 해와 달과 별들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우주 천체는 물론, 길가에 이름모를 풀꽃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소립자나 세균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시는 섭리의 영역 밖에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어서 엿새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작정을 이루시는 첫번째 사역이셨다.
하나님 이 외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다.(사 45:7)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그의 전능성과 주권성에 의해 작정대로 이루시는 사역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상계에 속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그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 빛이 비취게 하셔서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게 하셨다.
둘째 날 역시 천상계에 속한 물을 궁창으로 웃물과 아랫물로 나누어 공간을 이루게 하시고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하셨다.
셋째 날에는 천하계의 물에서 뭍이 드러나게 하셔서 뭍을 육지라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여 혼돈한 것을 질서있게 하셨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셔서 사시와 연한과 일자를 이루게 하셨다.
다섯째 날에는 새와 물고기를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셨다.
여섯째 날에는 땅의 생물, 육축, 짐승 등을 종류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흙으로 사람을 지어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로 만들어 남자와 한몸이 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우주와 만물들 하나 하나를 보전하시고 주관하신다.
우주의 운행,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의 생성과정들도 일일히 주관하시며 섭리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모두가 그의 전능성과 주권성에 의한 사역들이다.
일반학문의 이론 가운데 생물이 외계의 영향과 내부의 발전에 따라 단순에서 복잡으로, 하등에서 고등으로 진전하면서 점차 상호의 상태를 달리한다고 주장하는 진화론(evolution) 이 있다.
이 이론은 무신론(atheism) 이나 유물론(materiaism) 에 기초한 관념이기 때문에 유신론(theism) 적 입장과는 판이하게 견해를 달리하는 철학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4) 하나님은 예정을 이루신다.
롬 8:29 ~ 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대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멸망할 자를 멸망시키시는 사역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버리시기로 예정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 가시는 섭리과정에서 그의 전능성과 주권성은 물론이지만, 특히 성실성과 영원성과 자비성 등의 속성들을 아주 진하게 나타내어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예정섭리는 창세전 영원에서 계획이 된 것이기 때문에 현상세계에서는 현상적인 것으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성실성에 기초하여 예정하신 것을 이루어 주시고,
영원성에 기초하여 영원한 예정을 영원에서 이루시며,
자비성에 기초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예정대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을 이루시는 섭리가 주로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사역에 집중되고 있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세전 예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전능성과 주권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혹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이 합력해서 이루는 공동의 작품인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단독적 사역이시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물을 작정하시는 가운데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예정하셔서 구원으로 예정된 자를 모든 사람 가운데서 지명해 부르시고 중생케 하셔서 회개하고 믿게하여 의롭다하시고 양자로 삼으셔서 성화가 이루어지게 하시며 끝까지 지켜 주셔서 영화롭게 부활에 참여하게 하여 영원한 구원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섭리과정은 어느 하나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한 절대 주권적 섭리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만 믿을 수 있는 것이며(행 13:48) 믿음은 모든 자의 것도 아니다.(살후 3:2)
믿음은 구원의 근원적인 조건은 아니다.
구원의 근원적인 조건은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이며,
믿음은 하나의 지엽적 조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구원은 그의 자비성에 기초한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엡 2:8)
제 4 장, 기독교 인생관
1, 타락전 인간
1)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다.
2) 하나님이 생령으로 창조하셨다.
2, 타락된 인간
1) 선과 악을 아는 인간이다.
2)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다.
3, 중생한 인간
1)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이다.
4, 부활된 인간
1) 신령한 몸을 가진 자이다.
2) 천국에서 영원히 살 자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시 90:3 ~ 10 *
성경적 기독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신관에 이어 인생관을 고찰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신지식이 인생관의 전제가 되므로 신관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인생관이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생에 대한 질문은 인류역사와 함께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존재, 의미, 가치, 목적 등 인생관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견해들만 있을 뿐 정확한 해답은 얻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철학적 학문이 그러하듯이 인생관에 대한 철학적 견해 역시 그러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더불어 인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 인생관을 정립하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중요한 내용만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정리하기로 한다.
1, 타락전 인간
창 1:26 ~ 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타락(apostasy) 전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셔서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게 하시던 타락 이전의 인간을 말한다.
그 당시의 인간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셔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한몸을 이루게 하셨는데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타락 전 인간은 죄악이라든가 불의한 것 등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아주 순수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이었다.
1)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다.
창 1:27 ~ 3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선(goodness)이라는 말이 착함이라든가 훌륭함이라는 의미나 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선이라는 말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또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문에서 선이라는 글자를 "좋을 선" 으로 주석한다.
즉 좋은 것이 선이라는 뜻인데 문제는 좋아하는 주체가 누구인가가 문제이다.
일반 철학에서는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성경적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철학적인 면에서의 선과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선은 서로가 본질적으로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평하시기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은 물론이지만, 인간을 심히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도덕설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하는 성선설이 있다.
이것은 맹자가 주장한 학설인데 이같은 학설에 있어서의 맹자의 선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체가 된 선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의미의 기독교적 성선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덕적 성선설은 인간이 주체가 되고 기독교적 성선설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개념에 대한 예리하고 분명한 이해는 성경적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독교가 커다란 무리없이 도덕종교로 탈바꿈하면서 인본주의화 되어져가는 이유중에 하나가 선개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의 부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선개념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미숙은 기독교로 하여금 반드시 도덕종교 내지는 인본주의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만든다.
기독교에 있어서 선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도덕적 선행을 갖추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어떠한 도덕적 행위가 있어서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히 좋으시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선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같은 아담의 아들들이지만 아벨은 좋아하시고 가인은 싫어하셨기 때문에 아벨은 선한 자이고 가인은 악한 자였으며, 같은 이삭의 아들이었으나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으므로 야곱은 선한 자이고 에서는 악한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선하게 창조하신 사역은 그의 전능성과 주권성과 자비성에 의한 사역이시다.
즉 선하고 악한 것이 인간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주권과 사랑에 의하여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행위가 불결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자, 즉 사랑하시는 자를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셔서 불결한 것을 다 덮으시고 용서하시고 정죄하시지 않으시면 모두가 의롭고 선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전능성과 주권성과 성실성과 영원성과 자비성 등의 속성을 나타내어 계시하시려는데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전능하신 주권에 의하여 주어지는 변함없고 영원한 선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생령으로 창조하셨다.
창 2:4 ~ 7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타락되기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창조한 생령으로서의 아담이었다.
생령 아담은 빚어진 흙속에 하나님의 생기 즉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타락전 인간의 구성요소는 흙과 생기라고 할 수 있다. (흙+생기=생령)
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생기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므로 그 근원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흙속에 불어 넣어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해서 엿새동안 만들어 놓으신 모든 만물의 기초를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를 과학에서는 소립자라고 한다.
광물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기초 단위의 가장 작은 소립자는 모두가 동일하다.
같은 소립자들의 결합에 의하여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의 형체가 이루어진 것인데, 인간의 형체는 소립자들의 결합(흙)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 작용하므로 생령이 된 것이다.
따라서 생령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인간의 영의 기원에 대하여 서너가지 이론이 있는데, 선재설(Pre-Exisentianism), 유전설(Traditionism), 창조설(Creationism) 등이다.
선재설은 사람의 영혼이 전 세상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말하며, 유전설은 사람의 영혼이 세상에 출생될 때 육체와 함께 번식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리고 창조설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들의 영을 직접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이론이다.
성경은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셨다고 했고,(창 2:7) 생령인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고 하신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영의 기원은 처음 아담의 경우는 순수한 창조의 결과이며,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모두가 출생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출생에 의한 창조라는 말은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는 뜻인데,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생한 성도를 새로 지은 피조물이라(고후 5:17)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거듭난 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거듭난 자를 새로 지은 피조물이라고 한 것이다.
타락하기 이전의 생령 아담은 선과 악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생명과를 따먹기 이전이니까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는 아니고 뱀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도 있는 자였고(창 3:8) 볼 수도 있는 자였다.
2, 타락된 인간
창 3:6 ~ 8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령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타락해 버렸다.
그후, 아담과 하와는 타락한 상태에서 생육하고 번성한 것이 오늘날의 인류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이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출생한 모든 인간은 다 타락된 인간이다.
타락된 인간이 그 자신의 씨로 인하여 출생했기 때문에 세상에 출생한 모든 자들은 타락된 인간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락된 인간이란 어떠한 자를 말하는 것일까?
1) 선과 악을 아는 인간이다.
창 3:22 ~ 2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인간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하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아는 타락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이 선악을 알았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고 인간 자신이 심판주가 되었다는 것과 같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원하시지도 않는 일이다.
선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라면 악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에서는 선과 악의 정의를 대개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종교적 차원에서 선과 악의 정의를 말한다.
그것은 선과 악의 판단기준을 철학에서는 인간 이성에 두고 있으나 신학에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에 두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선과 악은 시대나 문화적 배경 또는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신학적인 선악은 절대적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좋다고 생각하는 선이 하나님에게는 싫어하시는 악이 되며 타락한 인간이 싫어하는 악이 하나님에게는 좋아하시는 선이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싫어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좋아했다.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인간은 선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즉 선하게 창조해 놓으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인데도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에 의한 죄로부터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범죄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으며 타락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후부터 모든 인류는 타락한 자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모두가 타락된 인간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신들이 좋아하는대로 하고자하는 욕심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욕심으로부터 나오고 욕심은 좋아하는데서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싫어 하시는 것을 인간이 좋아서 가지려고 하거나 하려고 하는 욕심은 죄가 되고, 인간이 욕심대로 행동하는 것은 곧 범죄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인간이 싫어하면 그것은 악이 되며, 인간이 싫어하는 것을 미워하면 그것은 죄가 되고, 인간이 미워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곧 범죄가 된다.
따라서 타락된 인간에게 있어서는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간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악이 되며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고 싫어하는 것을 미워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죄대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두가 범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인간들로서 자기들이 표준이 되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판단에 따라 마음에 생각되어지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악인이며 죄인이고 범죄자들이다.
2)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다.
엡 2:1 ~ 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어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 고 하신 말씀대로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말은 생령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이다.
아담은 범죄하고서도 즉시 죽지 아니하고 구백삼십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생령인 아담은 범죄하고 에덴에서 추방될때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금과를 먹고 죽은 것이다.
즉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다.
타락전 아담은 산 영이었다면 타락후 아담은 죽은 영이었다.
그러므로 아담 타락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난 후,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금과를 따먹기 전에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런데 금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금과를 먹기전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과 같다.
즉 영적으로 살아있을 때는 신령한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으로 죽어 육체가 된 아담과 하와는 신령한 눈은 어두워지고 육체적인 눈이 밝아졌다는 의미이다.
타락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금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되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은 가리워지게 되고 하나님의 저주가 덮인 것들만을 보는 눈이 밝아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신령한 눈은 어둡고 저주받은 것들만을 볼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난다.(요 9:41)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영적으로 죽어 신령한 눈이 어둡게 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시키셔서 어두운 권세가 지배하는 저주의 세상에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살게 하셨다.
인간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에(롬 6;16) 아담과 하와는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인 짐승중에 가장 간교한 뱀에게 순종함으로 사단의 노예가 된 것이다.
노예라는 것은 자유가 없는 것을 말한다.
타락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매인 자유자였다.
그러나 뱀의 말을 순종하여 사단의 노예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 매인 자유는 하나님께 종속된 자유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도 된다.
즉 하나님의 종은 자유이고 사단의 종은 노예라는 말이다.
일반학문에서는 자유를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정의는 인간이 자율(autonomous)적 존재로 가정이 되는데서 내려지는 정의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전이나 타락후를 막론하고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해서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게 절대적인 자율성을 부여해서 독존하도록 독립시키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관 하시고 보호하시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전에는 생령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종속되어 자유로웠으나 타락후에는 사단에게 매여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사단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 된 것이다.
3. 중생된 인간
요 3:3 ~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아담 타락이후,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어서 태어난다.
그리고 사단의 노예로서 죄인으로 태어나 범죄하며 살아 간다.
이렇게 죽은 자로 태어난 인간은 다시 태어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것을 곧 중생 (reincarnati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죄와 허물로 죽은 자와 중생한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이 비슷하다.
그것은 죽은 자나 중생한 자가 다같이 저주가 덮힌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 이면에 존재하는 영은 서로가 전혀 다른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다.
롬 8:9 ~ 10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중생된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말한다.
조상의 혈통을 따라 난자는 육으로 난자이기 때문에 육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난 자는 영이다.(벧전 1:23)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인간들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택한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히 부어 주셔서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해 주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딛 3:5 ~ 7 참조)
그러므로 중생이란 인간편에서의 어떠한 선한 공로나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령의 절대적인 단독적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작이시다.
혹자들은 중생의 역사가 인간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과 하나님편에서의 도우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의 힘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역사인 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오해한데서 발생한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고 부패되어 완전히 영적으로 죽어버린 존재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죽어버린 존재가 스스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선한 공로나 노력을 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을 중생의 필요조건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나 타락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부분적 부패나 타락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즉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더러워졌고 부패되어져 있어서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알고 있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성경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아니하고 죽었던 자라고 밝혀주고 있고 (엡 2:1)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으며 (딤전 5:6)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했다.(계 3:1)
따라서 중생의 역사는 성령의 단독적인 주권적 역사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나게 하신다.
썩지 아니할 씨는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을 의미한다.(벧전 1:23)
인간 육체는 썩어질 씨로 난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영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난 것이다.(약 1:18)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말씀의 씨가 죽은 인간의 영을 다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거듭난 영적 생명은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육으로 난 자에게서 나오는 육의 소욕과 성령으로 난 자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소욕이 함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육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반대로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을 거스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성령의 소욕이 승리하도록 하셔서 점점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지만 때로는 육의 소욕대로 내버려두셔서 시련을 통한 신앙적 성장을 유도해 가신다.
2)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이다.
롬 8:13 ~ 17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중생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를 말한다.
육신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롬 9:8)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인 것이다.(요 1:12 ~ 13)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능력으로 된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했으므로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의 이름을 깨닫고 믿게 해 주셔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다.(엡 2:8, 롬 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해서 불결하고 흠이 많은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케 하셔서 아들들이 되게 하신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모두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이루신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선하게 창조해 놓으신 아담을 타락하도록 놓아두시고 추하고 흠이 많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일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예정섭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택자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데 있다.(엡 1:3 ~ 6)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창조하신 후에 타락해서 죽게 하셨다가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탕하여 거지가 된 후에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에서 방탕하다가 돌아온 탕자를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해서 아버지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예수께서 교훈하셨다.(눅 15:11 ~ 32)
즉 하나님께서 택한 아들이 타락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말이다.
앞서 기독교 신관에서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한 바가 있다.
온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창조되고 운행되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구원도 되고 멸망도 된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주권성과 성실성과 자비성을 인간들에게 나타내어 깨달아 경외하게 하시는 것이다.
타락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안되는 것이 현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결정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결정권도 인간에게는 전혀 있을 수 없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다.
다만 창세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뜻이 창조세계에서 시기 따라 계시되어지는 것 뿐이다.
4. 부활된 인간
고전 15:16 ~ 19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성경적인 기독교는 인간의 부활을 가르치고 믿는다.
그러나 명목상 기독교라고 자처하는 사이비교회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이나 인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기독교 이외에 이방 종교들에서는 환생을 말하는 경우는 있으나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환생과는 그 성질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부활은 시간세계의 역사의 종말과 영원세계를 전제한 것이라면 이방종교의 환생은 시간세계의 순환역사를 전제로 한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된 인간은 어떠한 인간일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기독교 인생관 정립에 필수 과제인 것이다.
1) 신령한 몸을 가진 자이다.
고전 15:42 ~ 46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부활된 인간은 신령한 몸을 가진 자이다.
신령한 몸은 썩지도 아니하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을 말한다.
인간의 몸은 두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하나는 육의 몸이고 또 하나는 신령한 몸이다.
육의 몸이란 타락전 아담이나 타락 후 인간을 비롯해서 중생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몸을 말하고, 신령한 몸은 부활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몸을 말한다.
혹자들은 기독교의 부활을 재생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재생은 육의 몸으로 죽었다가 육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고 부활은 육의 몸으로 죽었다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재생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부활이다.
재생은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살아나는 것이지만 부활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장가나 시집을 가지 않는 천사와 같은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부활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다.
성도들의 부활은 앞으로 있게 될 예수님의 재림 때에나 있게 되는 것이다.
부활된 인간의 신령한 몸은 부활 이전의 타락 전 인간이나 타락된 인간이나 중생된 인간의 육의 몸과는 성질상 전혀 다르다.
신령한 몸은 썩지도 아니하고 영광스러우며 아주 강한 몸이지만, 육의 몸은 썩는 몸이며 욕된 몸이며 약한 몸인 것이다.
육의 몸이 썩고 욕되며 약한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의 몸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생령이 죽으므로 저주의 몸이 된 것이다.
타락해서 저주를 받기 이전의 아담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령이 된 자의 몸이지만 이 몸 역시 육의 몸이었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생명과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면 아담의 육의 몸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에 삼킨 바 되어 썩거나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이 되었을 것이다.(창 3:22 ~ 24)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어버린 인간을 중생케 하셔서 썩어질 저주의 몸을 벗기신 다음, 부활을 통하여 신령한 몸을 입히시므로 썩지 죽지 않으며 영광스럽고 강한 몸이 되게 하셔서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인간으로서 중생하지 못한 자는 죽은 영에게 그대로 영원한 저주의 몸을 입혀 부활하도록 하셔서 심판을 통하여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요 5:29)
심판의 부활은 영원한 사망의 부활이며 지옥으로 향하는 부활이지만, 생명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부활이다.
2) 천국에서 영원히 살 자이다.
고전 15:50 ~ 54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된 자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이다. 혈과 육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고 살 수도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신령한 몸, 썩지 아니할 몸으로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살 수 있게 된다.
천국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영원한 나라이다.
시간, 공간, 형상 등은 영원한 천국을 계시하시기 위한 방편들이다.
즉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시간과 공간과 형상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이 곧 창조세계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심판을 전제한 창조였다.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시작이라면 심판은 창조세계의 끝을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궁극적인 실존의 모형물에 불과하다.
모형물은 실제의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시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인 실존은 하나님과 또는 그 자신이 다스리는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과 형상화된 피조세계에 속한 흙으로부터 만들어진 육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첫 아담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 속했다고 했고, 둘째 아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났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자라고 했다.(고전 15:45 ~ 48)
타락한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지만 부활한 후에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도록 부활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어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천국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어 세워지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시간과 공간과 형상의 장애를 받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된 자들도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는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여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체를 이룬다.
이렇게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영원한 성전이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부활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가 하고 싶은대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생활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 좋은 것이 성도에게도 좋고 하나님께 싫은 것이 성도에게도 싫은 것이 된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선한 생활만이 성도에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매인바 된 참 자유함은 평강을 가져다 주고 이같은 참 평강은 감사와 찬송을 불러 일으켜 준다.
제 5 장, 기독교 역사관
1,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
1) 유실론적 역사이다.
2) 직선적 역사이다.
3) 종말론적 역사이다.
2,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
1) 역사섭리에 대한 주권성이다.
2) 역사내용에 대한 긍정성이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사 46:9 ~ 11
성경적 기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관(Outlook on history)이 가지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성경적 기독교 진리가 참으로 절대적인 진리체계라고 한다면 역사에 관한 문제가 제외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인간과 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전제 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란 인간 사회의 변천 및 발전의 과정, 또는 그것을 기록한 학문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지식에 앞서 모든 지식의 근본이 되는 신지식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관을 논하기 앞서 기독교 신관 및 인생관을 이미 논한 바 있다.
기독교 역사관을 논하는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선지식에 관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기본적인 원리문제들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1,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
시 33:10 ~ 16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성경적인 기독교의 역사관은 일반적인 역사관과는 다른 독특한 원리(Principle)를 가지고 있다.
역사관의 원리가 다르면 역사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잘못된 역사관의 원리에 의하여 역사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올바른 역사관의 원리에 의하여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갈등이 없는 것은 물론, 목적이 분명해지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은 올바른 역사원리에 의하여 역사 해석이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원리에 대하여 알아 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다.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는 역사의 근본에 대한 원리와 역사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방법에 대한 원리와 역사의 종국에 있어서의 결과에 대한 원리 등으로 대략 구분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등은 모두가 기독교적 역사해석의 기본원리가 되며 기독교 역사관 이해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
1) 유신론적 역사이다. (근본적 원리)
사 45:5 ~ 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기독교 역사관이나 일반 역사관에 있어서, 역사를 주관하는 근원적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역사관의 근본적원리로 나타난다.
역사는 과연 누군가가 주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치 않으면 우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같은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에서의 대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철학적인 역사관은 근본적 원리가 여러가지로 주장 되어짐에 따라서 역사관 역시 다양한 이론에 의한 주장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첫째는 계몽주의 역사관을 들 수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주관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의 이성의 힘은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마음대로 주관하며 조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역사관은 18세기 프랑스 혁명당시 계몽운동(Enlightenment)의 중심 사상인데 이같은 계몽주의 사상이 현대인들의 생각속에 다분히 침투되어 있다.
인간 자신의 이성적인 힘으로 건전한 사회, 국가, 또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사상은 바로 계몽운동 중심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말대로라면, 역사는 인간이성의 산물이라는 뜻인데 이와 같은 역사관은 기독교의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둘째로는 헤겔(Hegel)의 역사관이 있는데 헤겔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의 대표자로서 그는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주관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라고 하였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결과에 따라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인 정, 반, 합의 원리에 의해 역사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역사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사건들은 서로가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들이 아니고 이 모든 사건들을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보면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범신론(Pantheism)적 경향으로 흐르는 신관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신은 그 자신의 사상체계에 맞도록 억지로 고안된 신으로서, 역사진행 과정에 따라 계속 일어나는 사건들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어떤 힘을 말하는 것이다.
헤겔의 말대로라면 그의 역사관은 범신론적이라는 뜻인데 이와 같은 역사관은 기독교의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헤겔의 범신론은 인본주의적 산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가 만들어낸 역사의 의미를 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역사관도 기독교의 역사관과도 아주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관의 근본적인 원리를 인간의 자유라고 하였으나 알고보면 인간의 자유는 기독교 역사관의 근본 원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셋째로는 랑케(Ranke)의 역사관이다.
랑케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가로서 실증과 경험을 역사의 근본 원리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랑케에 의하면 인간들이 실제적으로 실증과 경험을 해보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로 이루어진 사건들을 곧 역사로 본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실증이나 경험을 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이같은 본능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실제적으로 실증과 경험을 시도하게 되고 그 결과로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아름다운 사상체계가 있는데 그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행동하는 결과에 따라 역사의 방향과 진행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랑케의 역사관 역시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것으로서 기독교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칼 마르크스 역사관이다.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물질적 생활, 곧 경제 관계의 방면에서 보고 정신적 활동도 물리적 생활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여 경제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계급 투쟁이 인류 역사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유물사관(Historical Materialism)의 주장자이다.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의 근원적인 원리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뒤에 있는 관념(idea)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한 반면,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물론, 헤겔의 관념적인 하나님마저도 제거해 버리고 역사의 근본적인 원리를 물질 자체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칼 마르크스의 역사관 역시 기독교의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계몽주의자들이나 헤겔이나 랑케 또는 칼 마르크스 등의 역사관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이거나 유물론적인데 반하여 성경적인 기독교 역사관은 유신론적이며 신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그 근본적인 원리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물질은 근본적 원인으로서의 역사의 주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의 주체는 근본적 원인이 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다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은 제 일차적 도구이며 물질은 제 이차적 도구일 뿐이다.
즉 역사의 근본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작정하신 바 뜻대로 역사를 진행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나 물질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기독교 역사관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근본적 원인이 되시는 유신론적 역사관이다.
2) 직선적 역사이다. (방법적 원리)
전 3:1 ~ 1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기독교 역사가 직선적 역사라는 말은 역사의 방법론적인 원리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진행을 이끌어 가시는지를 알아 보려는 것이 방법론적 원리인데 그 역사진행의 방법론적 원리가 직선적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출생하는 인간들이 모두가 다양하고 산발적이며 복잡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시작과 함께 끝을 향해 일관성있게 진행되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만사를 시작과 동시에 끝날 때를 정해 놓으시고 역사의 끝을 향해 직선적으로 진행시켜 가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하나님의 창조로 역사가 시작이 되어 역사 진행 과정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이미 정해 놓으신 심판의 날을 향해 곧바로 진행해 가는 목적론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 방법은 그의 주권적인 속성과 잘 어울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창세전에 피조세계의 전역사를 시작에서부터 과정은 물론 종말까지 완전하게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담아 계획(작정)하셨다.
이와 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역사적인 계획은 반드시 한치의 착오없이 창조를 통하여 시작하시고 진행시키셔서 정하신 끝날에 심판을 통하여 역사의 끝을 맺음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계획을 계시하신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역사로 보여주신 것이다.
구약역사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출발시키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아브라함에게 장래 후손들을 통하여 큰 민족국가를 이루어 주실 것을 언약해 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섭리하시는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대로 한치의 어김없이 역사를 곧바로 진행시켜 하나하나 이루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들은 첫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자손에 대한 언약이었고, 둘째는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으며, 셋째는 큰 민족을 이루어 다스리게 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다.
즉 국민과 국토와 국권을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국가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상의 세가지 중요한 언약들을 모두 다 성취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번째 언약대로 아브라함 후손들로 하여금 애굽에서와 광야에서 장정만 육십만이 넘도록 자손이 번성하게 해 주셨고,
두번째 언약대로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여호수아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정복하게 해 주셨으며,
세번째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유다지파인 다윗왕가를 세워 큰 민족국가를 이루어 살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역사 초기부터 하나님께서 목적과 방법을 작정하시고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셔서 언약대로 이루시기 위해 역사를 작선적으로 진행시킨 목적론적 역사이다.
구약의 역사적인 계시는 타락한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계시인데 일반적인 계시인 세계역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역사의 원리나 의미 또는 목적 등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 버려서 영이 죽은 인간의 이성적 기능으로는 도저히 일반계시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역사를 통하여 중생한 자들로 하여금 역사의 원리와 의미 또는 목적 등을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역사진행 과정중에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셨다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내용이 얼핏 보기에는 직선적 역사관과 위배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좀 더 깊이 상고해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시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관의 방법론적 원리는 작정하신 계획대로 목적을 향한 진행 과정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직선적으로 섭리해 가시는 목적론적 역사임이 분명하다.
불교에서는 윤회적 방법의 역사를 말하는가 하면, 헤겔의 역사관에서는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나선형의 방법에 의한 역사진행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역사진행 방법의 원리들은 모두가 인간의 사색이나 경험에 의한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서 기독교 유신론적 역사진행 방법의 원리와는 판이하게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3) 종말론적 역사관이다. (결과적 원리)
마 24:32 ~ 36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기독교 역사가 종말론적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결과론적 원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 역사의 결과론적 원리는 종말론적이라는 뜻이다.
이 원리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근본적 원리와 대비해서 이해가 가능하다.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 원리는 유신론적이라고 했는데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근본적 원리가 되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의 근본적 원리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이고, 역사의 결과적 원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역사의 종말을 맺으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결과적 원리는 바로 앞서 말한 바 있는 방법적 원리와 조화를 이루어 이해될 수 있는 원리이다.
방법적 원리가 말하는 바는 역사가 출발점으로부터 종결점을 향하여 직선적인 방법으로 진행한다는 뜻이었는데, 바로 역사의 종결을 전제한 원리였다는 점에서 결과적 원리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시간과 공존한다.
그리고 시간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공간은 형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형상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공간은 시간을 가능하게 하며 시간은 역사를 동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과 형상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섭리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과 형상적인 것으로 만드신 것이 피조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존하는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 되었기 때문에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역사의 종결이 맺어지는 것이다.
일반역사에서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결과적 원리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가 존재하는 한, 역사는 계속해서 끝없이 진행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의 결과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결과적인 목적이 없기 때문에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의 의미도 찾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마다 또는 민족국가마다 나름대로의 다양한 역사의 의미나 목적을 설정하고 해석해서 역사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역사가 역사의 근본적 원리에서부터 빗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일반적인 역사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일반적인 역사관은 종말론적인 결과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인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없고, 역사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역사진행 과정에서의 올바른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며,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삶의 현장에서 가치로움을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이 종말론적인 결과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인 역사의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종말은 역사의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 달성되면 끝내는 법이다.
역사를 출발시키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목적을 설정해 놓으시고 역사를 진행시키셔서 목적이 완성되면 역사를 종결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역사관은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은 물론, 역사진행 과정에서의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이며, 의미 부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참으로 가치로움을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종말은 인류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을 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영원세계를 전제하지 않고 역사의 종말을 허무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종말은 영원한 세계를 전제로 한 종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망적인 것이며 역사목적 완성의 영원한 실현인 것이다.
2,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
사 14:24 ~ 27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성경적인 기독교의 역사관은 일반적인 역사관에서는 비교적 찾아 볼 수 없는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기독교 역사관과 일반적 역사관은 그 원리부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역사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역사관은 원리부터가 특수하므로 성격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가 특수성을 띠고 있다는 것부터가 특성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원리 부분을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 원리부분의 특성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부분에서의 특성 몇 가지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기독교 역사관의 입장에서 역사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발견하게 되고 다음으로는 역사 내용 자체가 모두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역사섭리에 대한 주권성이다.
대상 29:11 ~ 12
"여호와여 !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기독교 역사관에 있어서 특성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주권성이다.
즉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섭리의 주권성은 앞에서 이미 논술한 바 있는 기독교 신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관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만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있어서의 주권성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먼저,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성이 언급되는 까닭은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온갖 역사적 사건들이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섭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섭리에 대하여는 이미 기독교 신관에서 하나님의 사역중에 하나임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확실한 근거로는 신관에 앞서 기독교 성경관을 언급하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간추려 제시한 내용으로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으신 것을 비롯해서 인간의 타락,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벨의 죽음, 노아시대의 홍수, 바벨탑의 파괴, 아브라함의 선택, 이삭의 출생, 야곱 사랑, 야곱후손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출애굽사건, 광야 사십년 방황, 가나안 정복, 다윗왕국 건립, 이스라엘의 분국, 북이스라엘의 패망, 남쪽 유다의 바벨론 포로생활, 예루살렘 귀환, 다윗왕국의 재건, 예수의 출생,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강림, 복음전파, 예수재림, 최후의 심판, 영원한 천국 등 모두가 창세전 영원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섭리에 의하여 과거에 이루어진 것이며 현재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 이루어 질 것 등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쉴사이 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도 어느것 하나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선사시대를 비롯해서 고대 에집트 문명, 앗시리아 문명, 바빌로니아 문명, 페르시아 문명,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 또는 인도 문명, 중국 문명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갖 문명의 역사들도 모두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섭리에 기초한 것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 역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 하나님의 주권성이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 중 하나로 언급되는 또 하나의 까닭은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가장 작은 기초단위인 소립자로부터 시작해서 웅대한 우주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이 번식하는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우주 천체가 파괴되는 엄청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사건 하나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마 6:26 ~ 30 참고)
혹자들은 생각하기를 어느정도 큰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그 나머지 일들은 인간이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합력해서 그 무엇을 이루어 간다고 오해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일이든지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는 자들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다고 했다.(마 10:29 ~ 31)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할 때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6 ~ 28)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사 41:2 ~ 4)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의 역사이든, 일반계시로서의 역사이든 간에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적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이다.
2) 역사내용에 대한 긍정성이다.
행 4:24 ~ 28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기독교 역사관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성은 역사내용에 대한 긍정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정해 놓으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정하신 뜻을 따라서 모든 만사를 섭리해 가신다는 대 전제 아래 역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내용들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시간 세계와 함께 출발한 인류역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어져 왔다.
크게는 우주의 운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미생물들의 생존과 번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크고 작은 일들로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이렇게 이어져 온 역사과정에서 전쟁과 폭동 그리고 평화와 안정은 물론,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 또는 행복한 일이나 불행한 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의한 선악간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궁극적인 선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적 사건들이라는 뜻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진다는 점이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조사역은 세상 종말을 전제하고 타락은 구원을 전제하며 때리심은 싸매심을 전제하고 헐으심은 세우심을 전제하고 흩으심은 모으심을 전제로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상 종말을 정해 놓으시고 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하도록 버려두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작정해 놓으시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나 세상 종말을 섭리하시는 사역 또는 타락과 구원, 때리심과 싸매심, 헐으심과 세우심, 흩으심과 모으심 등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 궁극적인 선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하등의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 차원이나 도덕적 차원에서는 서로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관은 모든 것의 가치기준을 인간이나 도덕률에 두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창조주 하나님 자신에게 그 평가 기준을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관에서 모든 만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그 가치평가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셨는데(사 45:7) 인간이 보기에는 빛과 어두움이 정반대가 되는 성질의 것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빛과 어두움이 일반인 것이다.(시 139:12)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엿새동안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하신 것같이 이 세상 모든 역사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으시도록 끝맺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선한 목표이시다.(롬 8:28)
기독교 역사관은 역사 진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구분 없이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에도 사건마다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역사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 그 차체만으로는 부정적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그 자체는 물론 부정적인 것이며 선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많은 역사적 교훈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역사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시각에 의한 의미부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와는 반대로 역사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평화 그 자체는 긍정적인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역사속에서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불완전한 평화라 할찌라도 그것이 이루어져서 일단은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불완전한 평화로 인하여 더 큰 역사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경우 이것 역시 부정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관은 이와 같은 경우의 불완전한 평화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적인 방법적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모든 일에 긍정적 가치평가에 의하여 의미 부여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어려운 상황아래 처한다 할찌라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물론, 역사의식과 함께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역사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살전 5:18) 보람된 생활을 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다.(히 11:33 ~ 38)
제 6 장, 기독교 세계관
1. 세계의 구성과 성질
1)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이다.
2) 유한적 성질을 가진 세계이다.
2. 세계의 가치와 목적
1) 세계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2) 하나님 영광선포에 목적이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 1:15 ~ 17 -
성경적 기독교의 세계관(View of the world)을 맨 마지막으로 거론하는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본서의 결론이나 다름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보면 지금까지 앞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차례로 알아보기 위해서 서론 다음에 성경관, 신관, 인생관, 역사관 등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세계구성의 의의나 가치 및 목적에 관한 통일적 이해를 일컫는 말이다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란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피조물이기 보다는 인간이 세상살이에서 얻어지는 인생체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계관은 인간이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이 진실되고 가치로운 삶인가를 묻고 이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성 있게 해석하게 한다.
이 물음은 모두가 인간 자신에게 던져지는 물음인데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좀더 근원적이고 폭넓은 질문이 필요하게 된다.
질문의 내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근본적 실체가 무엇인가를 물은 후에, 계속 이어서 세계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상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으면서 인간 행동의 표준이 되는 도덕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이에 비슷하거나 조금은 색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든 질문들은 위의 질문안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다 포함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앞서 언급한 신관, 인생관, 역사관 등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본론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기로 하고 원론적인 몇 가지 내용만을 결론삼아 논술하기로 하겠다.
1, 세계의 구성과 성질
단 4:34하 ~ 35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먼저 풀어야 할 원론적인 문제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이 되며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의 내용에 따라서 나머지 세계관에 대한 모든 문제의 답이 결정이 되고 이에 따라서 종합적인 세계관이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속에 살아가면서 허다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자기 자신에게 구체적인 질문으로 다가오는데 이에 대한 해답을 회피하면서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람마다 문화적 환경이나 개성에 따라 문제의식의 심도가 깊을 수도 낮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신이 느끼는 문제의식의 심도만큼 자기 나름대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거나 더러는 체념한 채 살아가기도 하고, 혹자들은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부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알고보면 이것도 그 나름의 세계관이거나 철학적 입장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인가를 재고(reconsideration)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더러는 재고하는 것조차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정확하고 분명한 세계관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다양한 형태의 세계관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어떠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먼저 세계의 구성과 성질에 대하여 알아 본다.
1)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이다.
사 14:24 ~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과학적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창조에 대하여는 앞에서 기독교의 신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임을 밝힌 바 있고 역사적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섭리에 대하여는 기독교 역사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세계창조와 역사섭리에 대한 세계 구성(Composition)의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만들어져 전해오는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차례로 살피면서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과 그 구성면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찾고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우월성과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를 확증하려고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세계의 구성이 창조주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의하여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간의 구원과 멸망도 예정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세계창조는 물론이지만 역사적인 인간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에서는 그 형태도 다양하지만 어느것 하나도 세계의 구성이 신적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세계관은 하나도 없다.
먼저,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서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자들은 말하기를 과학적 이해의 대상이 되는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후 우주의 운행은 스스로 하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주 안에 내재하시는 신이 아니며 인간이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신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이미 결정이 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적이나 이적같은 역사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도 인격체이기는 하지만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신론(deism)자들의 주장이 모두 한결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를 극단적인 형태로 살펴본 것이다.
다음은,
자연을 근본 원리로 삼고 모든 현상을 그의 소산이나 소위로 돌리는 자연주의(naturalism)는 유신론에서 이신론을 거쳐 파생된 무신론적 사상이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 자체가 영원한 것이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견해는 이신론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우주란 완전히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우주 밖에서 우주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갇혀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 역시도 우주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에 의해서 우주를 재조정 할 수 없도록 갇혀있는 것이 우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물의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 자연질서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그런데 자연질서가 확정적이냐 불확정적이냐에 대한 자연주의자들의 견해는 서로 다른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견은 인간관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질서가 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들은 거대한 우주의 확정된 자연질서에 따라서 움직여야만 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본 것이고,
반대로 불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들은 인간의 자율의지에 의해 자연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주의는 18세기로부터 20세기말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굉장한 힘을 가지고 과학발전과 함께 현대문명을 장악하고 있다.
다음은,
사물의 실제나 진리는 물론 보편적인 표준마저도 일체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허무주의(nihilism)는 자연주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것인데 허무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연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미부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한 사건은 이유나 의미 또는 목적을 가질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가 자연주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되게 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자연주의에서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데 있으며 우주존재의 목적제시를 해주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우주가 존재하는 의미나 목적을 가지려면 우주의 한 부속품인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의미나 목적에 의한 가치판단은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인간 스스로가 할 수 밖에 없고 그것도 인간 개개인이 각자 나름대로 가치판단을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절대치의 가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주는 일치체가 아닌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연주의로부터 허무주의가 자연스럽게 파생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생존을 주제로 하고 또 그것을 자기 문제로 삼아 나아가려는 경향이나 주장을 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자들은 허무주의를 초월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자연주의에서 기생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가 있고 유신론에서 기생한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과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자연주의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인간의 본질과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주장은 우주는 단지 물질로만 구성되었는데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관적 실재는 정신, 의식, 인식, 자유, 안정 등의 주관세계(subjective World)를 말하고 객관적 실재는 물질, 불변의 법칙, 인과율, 시간, 기계장치 등의 객관세계(objective World)를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가운데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 있는 존재로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고 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앞에서 언급한 유신론의 대부분의 주장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출발전으로 하지 아니하고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의식에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라고 한다.
이것이 유신론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같은 차이점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기적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성경은 역사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양에서 범람하는 범신론(pantheism)적 일신론이다.
이 사상은 서양사상의 혼미와 방황을 끝내려는 현대인들의 노력으로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는 동양적 특유의 사상이다.
범신론적일신론(범일론 또는 만유신론)은 신이 곧 만유이며 만유는 곧 신이어서 우주 밖에 신이 따로 있지 않다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모두는 합일된 유일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도 현상적 계서제라는 것이 있어서 실재인 유일자와 합일이 되는데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의 순서로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 제일로 가까운 인간에게 있어서도 별도의 계서제가 적용이 된다는 주장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유일자인 실재와 완전 합일이 이루어지면 무한한 비인격적 존재 즉 무아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일자와 합일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교리가 아닌 기술에 있다고 보고 인격, 지식, 선악, 시간 등을 초월하는 것이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세계의 구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종교적 견해들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 부분의 내용은 제임스 사이어가 저술하고 김헌수가 옮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참고한 것임)
결론은 성경적 기독교의 견해와는 원리나 방법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신론의 경우는 기독교의 내재신은 부정하고 초월신만을 강조하고, 자연주의는 기독교의 유신론을 반대하여 무신론에 기초하며, 허무주의는 기독교의 우주에 대한 근원과 의미와 목적을 송두리채 무시하고 우주를 허무로 돌려버리고,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나 유신론적 실존주의 모두가 한결같이 기독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고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며, 범신론적 일신론은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우주의 모든 존재자체를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적 기독교의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의 구성은 어디까지나 영원자존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섭리에 따라 창조 보존되고 만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
2) 유한적 성질을 가진 세계이다.
계 21:1 ~ 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독특한 성질을 하나 꼽으라면 세계의 유한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여러가지 다양한 세계관에 대하여 살펴 보았지만 대부분은 세계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회피하거나 세계의 계속적인 유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첫 머리에 있는 창세기에서 세계의 시작을 알려주고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 계시록에서 세계의 종말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종말을 전제한 태초라는 시간의 출발과 함께 시작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반드시 시간의 종결과 함께 끝을 맺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기독교 역사관을 거론할 때 조금은 상세히 취급한 바 있다.
역사관의 원리 가운데 종결적인 원리로서 역사는 종말론적이라는 제목아래서 취급이 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세계와 인간의 종말이 모두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계속 진행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란 유한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우주도 인간도 역사도 모두가 유한적인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가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를 유한적인 것으로 보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세계라는 개념을 현세와 내세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개념은 오직 기독교 세계관의 특유물이다.
현세는 피조세계를 말하고 내세는 영원세계를 말한다.
내세라는 말의 뜻으로 보면 오는 세상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현세에서의 시간개념을 첨가한 이해개념이고 본래는 영원자존한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영원세계는 영원부터 자존해서 영존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와 반면에 피조세계는 영원세계에서 영원자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시간과 공간과 형상(물질)적인 것으로 창조되어진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와 영원세계는 이원론적 구별이 아니라 일원론적 구별인 것이다.
피조세계란 어디까지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다.(고후 4:18)
알고 보면, 피조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잠깐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도 유한하고 공간도 유한하며 물질 역시 유한한 것이다.
유한세계는 영원세계에 비하면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한 것이다.(시 90:4)
다시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피조세계의 유한성과 영원세계의 무한성을 비율로 계산할 때 Ω:0,000.....으로 계산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피조세계는 물질이 구성되므로 공간이 이루어지고 공간과 함께 시간이 형성되게 된다.
그런데 물질의 최소 기본단위는 소립자 또는 쿼크(Quark)라는 입자인데 이 입자 역시 궁극의 입자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비교적 덩치가 큰 원자는 특수한 장치(STM)로 볼 수 있으나 아원자 차원의 모든 소립자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단지 그 흔적(구름상자)만 추적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모여서 물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입자들이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하여 응집이 되면 하나의 커다란 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물질과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세계가 창조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물질과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피조세계는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며 영원할 수 없는 세계는 당연히 종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세계는 종말이 전제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세계가 종말론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창조라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만드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원 안에서 형상, 공간, 시간적인 것으로 만드셨다는 뜻도 된다.
영원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물질)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는데, 생각해 보면 영원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적인 피조세계에서 볼 때는 없는 것과 같다.
그와는 반대로 피조세계를 영원세계에서 볼 때에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에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있고 없다는 판단 기준이 영원 자존하시는 하나님께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것일 뿐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바로 그 자체가 시작도 되고 끝도 되는 것이다.(계 22:13)
그러나 참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따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할 수 없는 피조세계는 아무리 오래 지속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분명한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는 세계는 영원한 세계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세계는 종말론적임이 분명한 것이다.
피조세계가 종말론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피조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데 있다.
언제나 계획은 목적을 수반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수반한 계획이 창조로 시작이 되었다면 종말로 완성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목적을 수반한 계획을 창조로 시작하셨다는 것은 그 계획 자체가 시간 속에서 완성시킬 계획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 계획된 목적은 시간 속에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피조세계의 종말은 반드시 있어야하며 또 있도록 하나님의 계획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된 목적을 이루시는 방법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가 세계창조이며 둘째는 세계보존이며 셋째가 세계종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계를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끝을 맺으심으로 목적을 달성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섭리로 시작하시고 보존섭리로 존속시키며 종말섭리로 끝을 맺으시는 목적에 대하여는 다음 항에서 자세히 취급하게 된다.
여기서는 다만 세계의 유한적 성질에 대해서만 거론하기 위해서 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피조세계를 통하여 이루실 목적을 말한다.
이 목적은 영원세계에 이르는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게 되지만 일단은 피조세계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달성이 되는 목적이다.
지금까지 유한성을 가진 세계의 성질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논증했다.
우선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라는 개념이 영원세계와 피조세계로 구분해서 영원세계를 전제한 피조세계 개념으로 정리된다는 것과,
피조세계의 창조라는 개념이 종말을 전제한 것이라는 것과,
피조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목적이 수반된 계획실현의 출발로서 목적완성이 수반되는 피조세계의 종말이 전제된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을 들어서 피조세계의 유한성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는 유한적인 성질을 가진 것임이 확증된다.
2. 세계의 가치와 목적
시 145:9 ~ 13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세계의 가치와 목적을 알아보는 것은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가치와 목적은 세계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활을 할 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다양한 세계관들에 있어서는 세계의 가치와 목적이 다양하기도 하고 또는 희미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언급마저도 회피하거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세계존재의 근본에 대한 관념자체가 다양하거나 희미하고 언급을 회피하거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세계의 근본과 실재와 결과 또는 시작과 과정과 결말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근본이나 시작을 모른다거나 어느것 하나라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정확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세계의 근본이나 시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세계의 실재나 과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결과나 결말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여러 형태의 세계관은 대부분이 세계의 근본과 시작은 물론 결과와 결말에 대하여는 흐리거나 회피해 버리고 다만 실재와 과정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모두가 제나름의 주장이 나오게 될 뿐이다.
1) 세계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신 4:32 ~ 35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계는 절대의지자이신 하나님의 작정계획에 의하여 창조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반드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반드시 가치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미가 있는 것은 반드시 가치로운 것이다.
세계의 가치란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실려고 의지로 작정하신 세계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세계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계시로서의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의미이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로서의 근본적인 의미 외에는 모두가 간접적인 의미는 될 수 있으나 직접적인 근본 의미는 아닌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계시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일반계시이고 또 하나는 특별계시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성경관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건들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반계시도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시고, 특별계시 역시도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는 물론이지만 특별계시의 기록문서인 성경의 내용 역시 모두가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건이 포함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계시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가 가지고 있는 계시로서의 의미는 세계의 가치를 확실하게 해준다.
따라서 세계의 가치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 도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계시의 도구인 세계를 바로 아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계시의 도구인 세계를 바로 알게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얻어 경외하게 되고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 정립이 가능하게 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도구로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얻을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 정립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답은 이미 기독교 성경관을 거론할 때 해결되고 확정된 사실이다.
논리의 흐름에 따라 다시 한번 그 인식방법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건과 사물로 가득 채워진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특별계시로부터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락해서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진정한 지식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계시를 주신 이유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얻게 되면 그 신지식은 일반계시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계시인 성경은 내용 자체에 의하여 분명한 진리임이 확증이 되고 일반계시에 의해 실증이 되어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하나님을 모르면 세계를 알 수 없고 세계를 모르면 하나님도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만일 과학으로써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게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동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과학은 참 진리를 찾아가는 두개의 통로인데,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닦아온 통로라면, 과학은 인간으로부터 닦아가고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통로가 확실하고 찾기 쉬운 통로인가는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을 알고 세계를 알 수 있는 계시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는 참으로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도 모르고 세계도 알 수 없다면 인간 자신의 근원은 물론, 생존 과정에서의 의미도 모르고 가치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만사를 체념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이 비참함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특별계시를 세계속에 허락하셔서 하나님을 알며 인간 자신의 근본과 생존 과정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셨으니 피조세계가 가지고 있는 계시로서의 가치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2) 하나님 영광선포에 목적이 있다.
시 19:1 ~ 6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세계의 가치에 대한 내용이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설명이라면,
세계의 목적에 대한 내용은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설명이 되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의도하셨으므로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가치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의도하시지도 않았는데 인간에게 세계가 가치로운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어디까지나 목적에 수반이 되고 목적의 가치비중에 따라 그 비중도 결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선포에 있다.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이며 세계관 정립에 절대적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일반적인 세계관에서는 대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다양한 견해를 펴고 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떠나 버렸다고 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해야 할 이유를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인간 역시 우주의 한 부속품으로서 인간 편에서의 세계에 대한 목적부여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자연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세계의 목적을 부인한다.
허무주의는 그 자체가 세계의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존주의 가운데 무실론적 실존주의는 역시 신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신적인 목적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다만 인간적인 목적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나님으로 출발점을 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연히 회피되고 만다.
범신론적 일신론 즉 범일론에서는 역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유일 무한한 비인격적인 궁극적 실재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계에 목적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몇 개의 대부분의 세계관들이 세계의 목적 자체를 거론하지도 아니하고 거론할 필요성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목적없는 세계에 의미가 가능하며 의미없는 세계에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인간 자신들이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을 창출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일반적인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는 목적없는 방황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주인을 잃어버린 세계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방황은 계속되어질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 목적은 곧 전능자 하나님의 영광선포라고 했다.
그러면 영광선포라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영광선포가 세계의 목적이 될만한 가치는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광선포라는 말은 하나님께는 전능성과 성실성과 주권성과 영원성과 자비성 등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을 세계창조와 세계보존과 세계종말이라는 섭리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계가 존재하도록 창조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며,
영원전 작정섭리대로 창조하셔서 주관해 가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주권성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인간에게 약속하고 약속대로 성취해 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실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며,
피조된 세계의 종말을 맺으시고 영원한 세계를 주관 섭리하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성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영원 안에서 사랑과 은혜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영원토록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자비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피조세계나 영원세계 모두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이 목적이야말로 참으로 영원한 가치를 지닌 목적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동안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거의 매일같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보시기에 좋으신대로 하신 것 같이 보존섭리도 하나님 자신의 창세전에 작정해 놓으신 좋으신 뜻대로 섭리하시며 세계종말 역시도 그의 좋으신 뜻대로 섭리 하시는 것이다.
즉 모든 세계를 하나님 자신의 작정하신 좋으신 뜻을 따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종결을 맺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 자신의 모든 영광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곧 궁극적인 "선" 인 것이다.
즉 "최고선" 을 말한다.
이 최고선이야 말로 최고의 값을 가진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면 최고선은 궁극적 선을 말하고 궁극적인 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작정된 뜻을 따라 창조되고 보존되며 종결이 되는 피조세계에 대한 섭리이고 피조세계의 섭리는 하나님의 영광선포의 한 방편이시다.
따라서 세계의 목적 즉 영원세계나 피조세계 모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선포에 있는 것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