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난해]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버림이될까
고린도전서9:27절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자료는 끝까지 읽어보고 확인해보고 검토해보고 그리고 평안을 얻으시길 부탁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과 반대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되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복음은 버림이 되는 것입니까? 버림이 안 되는 것입니까? 지금 성경은 버림이 된 다고 말씀 하십니다. 잘못하면 버림이 된다고 말씀 하니까 참으로 난감 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계속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었으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복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에는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잘못하면 지옥에 갈 것 같이 기록된 성경 구절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이 성경 구절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간다고 말 하면 이 말씀을 가지고 질문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내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묻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버림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성경말씀을 오늘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직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아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성경말씀을 보여주면서 정확히 말씀을 드려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멸망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럼 지금 이러한 성경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은 그 한절만 놓고 보면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성경 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그 한절만 놓고 보아서는 안 되고 앞뒤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이해가 됩니다. 잘못하면 아주 이상한 해석이 될 수 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가룻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1장에 보면 네 하는 일을 속히 하고서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럼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과 자살해서 죽은 말씀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네가 가서 빨리 자살해서 죽으라는 말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니까 후에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시킨 것처럼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 안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탄생 자체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못해석하면 아주 엉뚱한 결론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천주교에서 수천 년 동안 기독교 말살을 위해 연구해 온 것을 슬며시 새로운 학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어느 교수는 자기가 연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제가 천주교에서 똑 같은 자료를 가져다 보여준 일도 있었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문과 같은 성경말씀을 해석하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은 한번 구원을 얻은 백성은 멸망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에 반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말씀이 많기 때문에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 할 때 절대로 복음의 원칙이 흔들리지 말고 연구해야 합니다 복음의 원칙을 그대로 두고 다른 것을 연구해야지 복음의 원칙이 흔들리면 잘못된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후에는 아예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를 믿는 다고 말합니다. 그럼 천주교는 예수를 안 믿습니까? 어떤 때는 멸망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멸망 한다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것도 맞고 멸망하지 않는 것도 맞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성경에는 양면성이 있으니까 그 양면성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양면성이 있습니까? 양면성이 없습니까?
성경에는 절대로 양면성이 없습니다. 성경에 양면성이 있다면 죽는 다는 것도 맞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맞고 그럼 어느 것을 택해야 합니까? 양면성이 있으면 어디에 기준을 두고 믿어야 합니까? 양면성이 있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못 보는 것이다. 그래야 맞는 것입니다. 성경에 양면성이 있다고 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가 또 믿어도 잘못하면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합당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본이 흔들리면 믿음 뿌리 자체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한쪽에는 영생을 얻은 사람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늘 말씀과 같이 내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전파한 후에 버림이 될까 하노라 말씀하십니다. 버림이 됩니까? 버림이 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자기가 버림이 된다고 말씀 하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들아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말씀도 넘어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잘못하면 지옥 갈 수 있다는 말씀과 마찬 가지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성경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우리는 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바로 알아야지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도 또한 성경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양면성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것은 해석을 잘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 양면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양면성이 있으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양면성이 있으면 어느 쪽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교회는 혼란스러워지고 영적이 생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확실하게 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복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내가 가질 태도는 성경을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후 관계를 잘 살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첫 절부터 복음을 전하는 문제를 말씀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지금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15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절부터 설명한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산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 전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러면서 나에게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부득불 정말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열심이 아닌 복음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말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장17절을 보면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직분을 맡았다고 말합니다. 앞에 내용에서 나오지만 바울은 사도라고 인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맡았다고 계속적으로 말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18-19절을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는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9장 전체의 내용은 복음 전하는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끝에 가서는 복음 전하는 일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가 버림이 될까 두렵다 이렇게 말 한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까? 성경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9:20절을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또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같이 되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9:21-22절을 보면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사도바울의 목적은 오직 복음 전하는 것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 형편과 같이 그렇게 된 것은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싸우면서 하든지 좋게 하든지 전파 되는 것이 복음이므로 나는 기뻐하노라고 말합니다. 싸우면서 전해도 복음만 전파되면 기쁘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사상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버림이 된다는 말과 싸우면서 해도 복음만 전파되면 좋다는 말은 반대 되는 말입니다. 자기 몸을 치지 못하니까 싸우는 것 아닙니까? 자기 몸을 친다면 자제하면서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두 말이 상충되고 있습니다. 싸우면서 해도 복음만 전파되면 좋다고 했다가 자기 몸을 치지 않으면 버림이 된다고 하고 두 말이 반대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는가를 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도전해 오는 문제입니다 공격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꼭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버림이 된다고 했는데 왜 버림이 안 된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면 아무리 성경적이라 해도 심지어는 이단시 취급을 합니다. 솔직히 지금 한국 교회는 사람이 하면 정통이 되고 하나님이 한 것을 믿으면 이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도바울의 생활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도바울의 생활은 전혀 다른 생활입니다.
그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 아닙니까?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의 규례를 따라서 하고 이방인에게 가서는 유대인의 규례를 따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도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9장은 앞에 있는 성경말씀이 해석이 되어야 뒤에 있는 말씀이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 지금 논리에 맞지를 않습니다. 이방인에게 가서 이방인과 같이 살았으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앞에 있는 말씀이 해석이 안 되면 뒤에 있는 말씀이 해석이 안됩니다. 앞에는 분명히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과 같이 산 것입니다.
유대인 앞에 가서는 규례대로 먹지 않고 자기를 절제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이 주는 것 다 먹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까? 유대인에게서 안 먹었으면 이방인에게 가서도 안 먹어야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것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가서는 그들과 같이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으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버림이 된다는 말은 서로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과 같이 있을 때는 아무것이나 다 먹었습니다. 그래야 복음을 받아들일 것 아닙니까 고린도 지방은 우상이 많은 지방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 대부분이 우상에게 받쳐진 제물들입니다. 소를 통째로 우상에게 받치고 그것을 잡아서 시장에서 팝니다. 돼지를 우상에게 받친 후에 그것을 잡아서 시장에서 팝니다. 우리나라도 잘 팔리게 해 달라고 고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판 물건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들 앞에 가서 그런 것을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먹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았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에게 가서는 절제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에게 가서는 그들 규례대로 살면서 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장 23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에 방해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서는 안 먹고 어느 곳에서는 먹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에게 가서 먹으면 복음을 못 전합니다. 아무것이나 먹으면 부정한 것을 먹었다고 상대도 안합니다. 이방인들은 아무것이나 막 먹는데 자기 혼자 안 먹으면 복음 전하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많은 경험을 해 보아야 압니다. 환자들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무리 비위가 상해도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합니다. 정말 어떤 사람은 비위가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과 같이 해야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유대인이 볼 때는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이 생각할 때는 잘못된 것이 됩니다.
규례대로 해야 하는데 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해야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것에서 자유하고 모든 것에서 해방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것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한도 내에서라도 유대인 앞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난리가 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이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달리기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9:24절을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너희도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9:25절을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절제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절제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서 절제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섞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운동 경기 선수들을 가까이 가서 그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고된 훈련을 합니다.
그들은 참고 인내 하면서 훈련을 합니다 합숙소에 들어가면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습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음식만을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더 먹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딱 정해진 양만 먹어야 합니다. 잠도 자기가 자고 싶은 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합숙소 내에서 정한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간에 돌려보냅니다.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1등 할 때만 그 감격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훈련 과정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입니다. 몇 년 전에 마라톤 선수 황영조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선수 생활을 그만 두었습니다. 너무 힘이 드니까 안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금메달 따는 것만 보고 좋아하고 환호합니다.
금메달을 따기 까지는 정말 고되고 피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한다 해도 다 1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많은 것을 지불하고 이룬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자고 싶은 것 안 자고 쉬고 싶은 것 못 쉬고 엄청난 절제를 하면서 한 것입니다. 절제라는 것은 많이 주어도 안 되고 적게 주어도 안 되고 아주 적당하게 하는 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들이 이렇게 절제를 하는데 그 이유는 상 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받는 것은 썩을 면류관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을 받기 위해서는 운동선수들과 같이 달음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것을 복음 전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경기도 상 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너희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이고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 이니까 더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힘써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장 26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그러므로 내가 복음 전하는 것을 방향 없는 것과 같이 하지 않고 이 말씀은 복음 전하는 일을 한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직 복음만을 이야기 했다는 말입니다.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과 같지 않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 하니까 싸워야 합니다.
에베소서6장12절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사도바울은 악한 영들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달음질 하는 것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싸운 것을 자세히 안다면 지금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죄를 범하면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매를 맞고 돌 팔메를 맞아 실신까지 해서 성밖에다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자기를 죽여서 내다 버렸는데 또 다시 일어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달음질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생애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생애를 보면 정말 피눈물 나는 험한 생을 살았습니다. 배고프고 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추위에 떨기도 했으며 잠도 못자고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실체를 보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마치 허공을 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싸워서 이기려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도 허공을 치는 것과 같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자기가 자기 몸을 이기지 못해서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참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가 참았겠습니까? 안 참았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도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니까 내가 다시는 말씀을 안 전하겠다고 돌아섭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속에서 불이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또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싸움에서 이런 달음질에서 내 몸을 쳐서 복종했다는 말입니다.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 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 이로라” 사도바울이 자기 몸을 쳐가면서 싸운 이유는 버림이 될까 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달음질하는 것이고 달음질해서 상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 장은 상 받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잘하면 상을 받고 이것을 못하면 버림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보면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달음질을 하면 상을 받고 달음질을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는 것입니다. 달음질을 해야 합니다. 달음질을 하려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달음질 한 것이 헛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헛것이 됩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는데 나가서 매일 사기나 치고 다니면 복음을 들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 하겠습니까? 저거 웃기는 사기꾼이네 하면서 복음을 안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나에게 와서 순 거짓말을 했네 하면서 안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안 받아 들이면 나는 실컷 수고하고 고생했는데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니까 그 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상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니까 내 생활 때문에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한 후에 복음을 전한 것이 버림이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내가 받아야 할 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달음질을 잘하면 상을 받고 달음질을 못하면 상을 못 받는데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다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잘 한 사람만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 상을 받으려면 내 몸을 쳐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복종 시키지 않으면 상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 때문에 안 받아 들이면 잘 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여 상 받는 것과 비교하면서 상 받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쳐서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아무렇게나 하면서 예수 믿으세요 해 보세요, 그럼 너나 믿으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방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먹을 것을 안 먹고 절제 하면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 한 것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5:13-16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나의 착한 행실로 인하여 예수 믿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내가 착한 행실이 없다면 나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혹시라도 자기가 절제하지 못해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 하지 못해서 복음을 전해 놓고 저 사람이 나 때문에 복음을 못 받아서 지옥 가는 사람이 있을까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상에 관한 문제입니다. 천국의 상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만 가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상과는 다르겠지만 그 영광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천국을 갔다 온 사람입니다. 그 상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상을 타는 사람도 절제 하면서 상을 타는데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 것은 썩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자기가 어떻게 될 줄 알기 때문에 그런 상을 앞두고 달음질 하는 사도 바울이 버림이 될까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 상을 잃어 버릴까봐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고 스스로 절제했던 것입니다. 먹을 것 안 먹고 할 것 안하고 참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전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상과 관계가 있음을 말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느냐 안 전하느냐는 상을 받느냐 그 상을 잃어버리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구원 문제에다 연결 시켜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상 얻는 자가 하나인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은 상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과 같이 했으면 유대인의 규례대로는 잘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율법이나 규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내가 상을 받는 것입니다. 상을 받으려니까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 같이 이방인에게 가서는 이방인과 같이 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9:22절을 보면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풍습과 생활이 달랐습니다. 그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만 해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복음 전하는 방법으로 일본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밥공기를 들고 먹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밥공기 들고 먹으면 옛날 어른들 같으면 상대도 안 할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는 기모노를 입을 줄 알아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을 입을 줄 알아야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해 질 것입니다. 아무래도 문화적 격차를 좁히면 친근하게 되지 않습니까?
일본 풍습을 그대로 가져와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다면 누가 그 복음에 쉽게 다가가겠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그 나라 실정에 맞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어렸을 때는 교회 안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았습니다. 만약 그 시절에 같이 앉으라고 권하면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 복음 전하기도 전에 쫒겨 날 것입니다.
바울이 간 지방 풍습대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했는데 도둑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믿음에 따라서 먹을 수 있으면 먹는 것입니다.
로마서14:1-2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로마서14:5-6절을 보면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은 각자 믿음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괜찬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을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먹었다고 말 하면서 그러나 다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보았을 때 실족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실족할까 생각해서 못 먹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 믿음에 따라서 합당한 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어떤 사람은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의 위대성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행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상 노래를 안 들려주면 지옥 갈 사람인데 세상 노래 때문에 같이 어울리다 천국을 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음의 위대성은 자기가 감당할 믿음에 따라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 사촌 동생은 아버지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해장국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선지를 다 골라내고 먹는 것입니다. 동생은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여러분 신앙의 판단에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같이 되든지 이방인 같이 되든지 약한 사람같이 되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되었다고 말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은 여러 지방을 다녔습니다. 지방 마다 풍습이 다르기 때문에 복음이 방해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복음에 방해를 받지 않는 가를 지혜롭게 잘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구원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전해야 저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복음 전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에서 일 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지도 못 할 사람을 무조건 일시키다가 실족하면 차라리 안 시키는 것만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배만 참석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잘 분별해서 일을 시켜야 합니다. 교회가 영혼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지 죽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복음의 위대성을 기억 하세요. 그리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해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있을 곳이 많습니다. 넉넉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복음 전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주님이 주님의 날까지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샬롬ⓗ